먼저 저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는 굉장히 오래동안 이 주제를 공부했습니다.
소설가니까 소설을 쓰기 위해서요.
그리고 아마도 만 페이지는 족히 넘을 소설들을 썼다가 지웠다가 했습니다.
기후변화는 한 인간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실을 공부하고 다시 이야기로 만들려고 했으니...
천재 이야기꾼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못난 작가니까요.
그럼에도 몇 작품은 출판사에 출간을 문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어렵다거나 재미없다면서 거절하더군요.
늘 그렇듯 절망했지만, 조급함이 더 컸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아본 사실을 보아, 이 세계는 위험했거든요.
과학의 서술과 수치에 대해 낯설고, 거대하기까지 한 우리의 위험....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러니 재미있게 풀지 못한 저 자신을 원망해야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도 이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출간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잘 나가는 작가가 아니니까요.
출판사들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요... 기후변화는 한 개인이 이해하기에 너무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자들도 90년대 이전까지는 믿지 못하거나 믿기를 망설였으니까요.
그저, 저는.... 소설로 말하고 싶었던...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주제를 꺼내는 제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서두를 이렇게 시작할 뿐입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나오는 책의 종류는 대부분 과학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대중을 위한 과학책에는 원리, 역사, 지구의 변화, 우리가 해야할 일에 대해 말하는 정도이고
미래학자나 경제에 관심 있는 분들의 책에는 과장되어 보이는 위험을 말하거나 아니면 인간이 극복할 수 있고, 그 기회에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를 안내하거나 합니다.
또 기후변화의 위험성에 대해 진지하게 말한 책은, 제가 예전에 읽었던 <6도의 멸종>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는 박사님의 최근작 <기후변화와 바다> 등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나온 다른 책 저자들을 보면 특이하게도 고지질학자들이 있습니다.
몇만 년 전은 찰나에 불과한 시간 범위를 연구하는 분들이야말로 이 분야의 예언자이죠.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서로 이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마치 나이테와 같아서 과거의 기록을 남겨두고 있으니까요.
지질학자들은 말합니다.
지구 단위의 대멸종은 흔한 일이고, 그때마다 지구 환경은 극적으로 변했다고요.
개중에는 생물의 대부분이 사라진 홀로세라는 지질시대도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기후변화는 왜 일어나는 것 같기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할까요?
저는 '개구리 삶기'라는 이야기만큼 기후변화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잘 설명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집어 넣으면 바로 튀어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서서히 온도를 올리면 삶겨 죽을 거라고요.
지구는 냄비이고 우리는 개구리인 셈이죠.
의사들이 때로는 통증이 사람을 살린다고 하는 의미도 그것일 것입니다.
아파도 신호가 오지 않을 때, 병은 치명적일 수준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구에 비해 너무 작죠.
그래서 과학자들이 위험을 경고했을 때, 비난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인간 때문에 기후가 변한다니, 과대망상처럼 들렸겠죠.
물론 지금은 많이 계몽되어서 말도 안 되는 폭우와 태풍도, 찌는 듯한 더위도 인간 탓이려니 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듯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은 추운 겨울은 뭐냐고 묻기도 하죠.
날씨특보에서 아무리 그래프를 보여주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를 과학과 일반 사회문화에서 다르게 쓰고 있어서 그렇죠.
그래서 과학자들이 단어 보다는 수치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명확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인간 모두가 알아야 할 전문지식에서는 수치는 피해야 하겠죠.
저는 인문학을 주로 공부하고 문학을 전공했으니 한번 설명을 해보려 합니다.
우선 1도 차이에 대해서...
유엔 기후변화 보고서나 관련 회의에서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은 1.5도를 넘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생각합니다. 어제 33도, 오늘 34도... 뭐가 큰일이라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비유해보겠습니다.
요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뜨거운 냄비에 댔습니다. 그 순간 손가락은 인간의 체온인 36.5도에서 37도를 훨씬 넘어선 온도겠죠. 뜨거운 그 순간의 온도는 적어도 38도를 넘을 겁니다. 이럴 때 우리는 차가운 물에 식히고 약을 바르는 등의 조치를 합니다. 물론 심하면 병원에 가겠죠.
하지만 손가락의 약한 화상 정도로 인간이 죽지는 않습니다.
자, 그러면 체온 이야기를 해볼까요?
감기몸살, 혹은 코로나 같은 병에 걸려 우리의 체온이 1도나 1.5도 올라가면 우리는 드러누울 수밖에 없습니다. 체온 1도가 오른다는 말은 손가락처럼 신체의 일부만 온도가 올라갔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 내장까지의 온도가 평균 1도 올랐다는 말입니다.
아기들 체온이 이렇게 올라갈 때, 어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애가 펄펄 끓는다."
날씨 1도는 손가락이 뜨거운 정도이고, 기후 1도는 체온입니다.
인간 체온이 올라 펄펄 끓는다 해도 손쓸 수 있는 체온과 이미 선을 넘어선 체온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1.5도는 그나마 치료가 가능한 온도라는 것입니다.
체온이 1.5도 오른 상태를 상상해보세요.
우리는 치료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기는 상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래도 인간은 회복을 빨리 합니다.
하지만 지구는 인간보다 훨씬 커서 회복하는 속도가 천년 단위라는 것입니다.
천 년도 아주 희망적인 숫자지요.
그리고 지구는 인내심이 아주 커서 병이 나기 전에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죠.
인간이 지구를 가열하고 있어도 그 나름의 질서 속에서 우리를 지켜왔다는 겁니다.
기후변화에 있어 인간은 방화범에 그칩니다.
즉 일은 저지르고 해결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지요.
위의 그림은 지구의 기후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알려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바람이 내 이마를 스칠 때, 그 바람은 대기권에서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폭우가 우리를 힘들게 할 때, 그 비는 우리가 아는 증발이나 그런 것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비는 대기의 구름의 짓처럼 보이지만 저 먼 바다와 바다의 해조류와 남극의 빙하와 페루 앞바다의 문제가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남의 나라의 산불과 가뭄은 인간과 숲과 대기 흐름과 바다의 흐름의 공모일 수 있고요.
우리가 당한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현상들은 사실 내과니 외과니 하는 분류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협진, 그것도 목숨을 건 협진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거죠.
대기권, 암석권, 수권, 생물권........ 지구의 모든 것들이 이미 앞으로의 천년의 날씨를 정해놓았거든요.
물론 방화범이 우리라는 것은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위의 그림 정도라고 안내받습니다.
멸종을 한다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라니.......
참 하찮아보입니다. 그러다보니 한 인간인 내가 안 해도 대세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입니다.
때로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죄책감에 휩싸입니다.
저는 얼마전 사소한 교통사고를 냈는데, 그 '기회'에 차를 없앴습니다.
중고 휘발유차였거든요.
차를 운전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전기차나 수소차 역시 대부분은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그런데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저런 하찮은 일 뿐일까요?
저는 그 질문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한 개인에게 죄책감을 일으키는 것말고,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이 안 될 절망과 남의 탓 말고
인간이 진짜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요.
물론...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아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주위에 계신 존경할 만한 연구자님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말이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