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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ul 10. 2020

퍼뜩, 고양이처럼~

- 진짜로 배우고 싶은 인생 고수 

아버지의 밭에 밥 먹으러 오는 고양이가 있습니다.

어느 겨울, 떨고 있는 게 불쌍해서 밥을 한번 챙겨 준 후로 거의 매일 찾아온다는 냥이죠.

애완동물 키우는 것을 싫어하는 아버지였지만, 고양이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시며 사료와 물을 정성껏  챙겨주십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동물에 돈 쓰는 걸 아까워하시는 옛날 분이라, 처음에는 밭에 우연히 남아있던 개사료를 주셨다고 해요.


"그게 그거 아닌가 해서 줬는데, 물만 먹고 하나도 안 먹고 가지 뭐야?"


어리둥절하신 아버지께 저는 개사료는 개입맛, 고양이 사료는 고양이 입맛이라고 말씀드렸죠.


"아니꼬워서 이젠 안 챙겨줄 거야."


이렇게 말씀하신 아버지, 하지만 그 후로 꼬박꼬박 고양이 사료를 사다가 매일매일 밥을 주고 계십니다.

출처: 픽사베이

고양이는 야멸차다고 역시 싫어했던 어머니.

집에서 남은 고기가 있으면 잘 싸다가 별미로 내어줍니다.

그런 어머니도 고양이가 아니꼽다며 저에게 이르셨죠.


"한동안 고기를 안 갖다주면, 나와서 야옹야옹 울어."


어머니는 고양이에게 네까짓 게 뭔데 입맛 따라 먹을 걸 내놓으라고 잔소리냐며 한 마디 하셨다죠.

그러자 다음 날 고양이가 죽은 쥐를 한 마리 가지고 오더랍니다.


"저도 한 몫 한다고 시위를 하더라니까."


고양이의 끔찍한 보은에 어머니는 밭에 가실 때마다 비린 것을 챙기십니다.

 

출처: @alliesatwar


부모님의 반 집사 생활을 지켜보며 저는 고양이의 처세술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모든 고양이의 태생적 재능이라지만, 변하기 힘든 어르신들까지 조련하는 솜씨가 너무 놀라워서요. 

하긴 우리 부모님 뿐만 아니라, 고양이에게 찍힌 인간은 꼼짝없이 조련당하기 마련이죠.

교과서에나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責猫 고양이를  꾸짖다 
                                  - 李奎報(이규보)
盜吾藏肉飽於膓 감춰 둔 내 고기 훔쳐 배를 채우고
好入人衾自塞聲 이불 속에 잘도 들어와 고르릉대는구나
鼠輩猖狂誰任責 쥐떼가 날뛰는 게 누구의 책임이냐
勿論晝夜漸公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버젓이 횡행하네

고양이의 본분이라 할 쥐는 안 잡는 주제에

주인의 고기를 훔쳐 먹고도 버젓이 주인의 이부자리에 철퍼덕 자리를 잡는 냥이.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고양이는 꾸준히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변상벽, <고양이와 참새>

조선시대에 왕과 겸상하고, 동침한 애완동물도 고양이가 유일합니다.

조선시대 고양이 금덕이와 금손이의 집사는 무려 숙종이었습니다.

숙종은 금덕이의 장례도 치러줄 정도였죠.

그런데 마누라를 둘이나 그렇게 못살게 굴었어야 했나요...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 착한 인현왕후는 강아지 과라 싫어했나요?

그 아름다운 장희빈은 고양이 과라 싫증이 났나요?... 라고도...

나쁜 남자, 숙종도 어쩔 수 없이 모시고 살아야 했던 고양이.

금덕이와 금손이가 숙종시대의 진짜 위너인 것 같습니다. 

픽사베이

하지만 고양이에게 진짜 배우고 싶은 것은 이런 처세술도 용인술用人術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을 사는 법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고, 졸리면 잠을 잤다. 
그리고 자신의 발톱 끝에서부터, 느릿느릿 움직이는 꼬리 끝까지, 
자신의 존재 전부를 즐겼다. 
그는 정원과 나무들 사이를 즐겨 거닐었고, 또 
푸른 풀밭에 누워 달콤한 여름을 느긋하게 즐겼다. 
그 나태함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휴식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캘빈: 성격에 관한 탐구'. <고양이를 쓰다>, 찰스 더들리 위너, 송승현 옮김, '시와서'


뮤지컬 <캣츠>를 낳은 T.S 엘리엇 말고도 수많은 작가들이 고양이에 대한 헌사를 썼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찰스 더들리 위너가 자신의 고양이 '캘빈'에 대해 쓴 것을 읽으며 감탄을 했는데요, 

이 구절 안에 인생을 사는 법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발톱 끝에서부터, 느릿느릿 움직이는 꼬리 끝까지, 자신의 존재 전부를 즐겼다."


특히, 이 구절에 감탄했지요.

사실 생각해보면 고양이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생물을 인간 뿐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캘빈'이 그렇듯 자신의 존재 전부를 즐기며 평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도 많지는 않습니다.

고양이 만큼 예쁜 동물이 세상에는 많지만,

개는 언제나 주인을 보고 있고, 호랑이는 사냥에만 관심이 있으며, 공작은 그 멋진 날개를 애인한테만 보여주죠.

느긋하게 자신을 다듬으며 스스로에게 감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역시 고양이 뿐인 것 같습니다.

 

픽사베이 Cheryl Holt

사실, 사람도 아기 때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즐깁니다.

전통적으로 부모님들이 아기와 놀아줄 때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눈은 어디에 있나?"  "요기~"

"코는 어디에 있나?"  "조기~"

"입은 어디에 있나?"  "거기~"


그래서 아기들 그림책은 어른들이 보면 당연한 것들만 담았죠.

'까꿍', '잼잼', '누구 없다~' 등등 이야기랄 것도 없이 그저 아기의 몸을 인식시키는 책들입니다.

예전 출판사에 다녔을 때는, 도대체 왜 이런 책들이 아기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이해할 수 없었죠.

하지만 자존감의 출발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라는 것을 알게된 후에는 그 까닭을 알았습니다.


픽사베이


 0~3세의 아가들은 하루가 다르게 인지능력이 발달해가기 때문에 매일 매일이 새로운 발견이지요.

이제 막 세상에 온 아가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눈이 있다는 것도 코가 있다는 것도 입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기쁜 사건인 것이죠. 

그러니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고 자랑스러워 할 만 합니다. 

즐기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죠. 


픽사베이

그리고 아기를 돌보는 보호자는 누구나 아기의 먹거리를 가장 먼저 챙깁니다. 

몸과 몸을 이루는 먹거리. 이 두 가지가 바로 자존감의 근원이 되는 것이죠.

자신의 눈 코 입에 놀라 기뻐하는 아가와, 아가의 몸을 이룰 먹거리에 집중하는 엄마. 

나라는 존재는, 수없이 눈과 코와 입을 가리키면서 이 몸이 나의 것이라고 깨치면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 이유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힘든 상황에서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나 살펴보면,  

자신을 가장 많이 무시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힘들다고 대충 먹거나 아무거나 먹거나, 

힘들다고 아픈 몸을 제때 치료해주지도 않고, 잠도 잘 수 없게 생각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햇살 쬐며 밖에 나가는 일도 게을리하고요...  

어렵게 내 것이 된 몸.

괴롭다는 이유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챙기지 않는 것이죠.

이 생각 속에는 나의 몸이 당연히 나의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고양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즐기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양이를 볼 때마다 저는 퍼뜩, 생각합니다.

"아, 배우고 싶어라~"

자기를 아끼고, 완벽하게 누리는 저 당당함...

어쩌면 완벽한 자존감은 고양이만 따라해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요.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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