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공원을 돌다 보니 제법 따뜻한 봄기운이 가득하다. 요 며칠 아침 공기와 밤공기가 싸늘하여 봄은 저만치에서 느릿느릿 오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 순간 성큼 다가와 속삭이고 있다. 20년을 조금 넘은 낡은 우리 아파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공원에는 둥그렇게 커다란 원을 그리며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촘촘히 심겨 있어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기에 그만이다. 작은 공원을 뱅글뱅글 잽싸게 도는 내 시야 중간중간에 다른 색깔의 나무의 얼굴들이 조금씩 비춘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들리는 음악으로 공원 속의 다른 이들의 세상과 차단한 채 걷고 있지만 계절을 알리는 자연의 손짓만은 막을 수 없다. 이렇게 조금씩 자연을 보고 느끼고 있자니 색에 취해, 나의 감성에 취해 잠시 어지럽다. 걷고 또 걸으며 자연이 전해주는 아름다움에 젖어본다. 계절마다 달리 아름다운을 전해주는 나무들, 저 나무들에게도 리즈 시절이 있을까?
리즈 시절은 외모, 인기, 실력 따위가 절정에 올라 가장 좋은 시기이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 선수 스미스(Smith, A.)가 축구 클럽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던 때를 이르던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리즈 시절’이라는 표현은 과거의 화려한 모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하고 돌아오지 않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과거의 모습에서 잘 헤어나지 못한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과 묘한 짝꿍을 이루며 숨겨진 과거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표정과 말속에 녹여낸다.
공원에 빽빽이 심긴 나무들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낡은 철제 운동기구 옆의 저 나무는 매년 봄마다 꽃망울들을 소담하게 터뜨리며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저 갈색 벤치 옆의 나무는 봄에는 어설프게 초록 물을 가득 머금고 있지만, 가을이면 화려한 나뭇잎들을 가득 단 채 가을의 공원을 온통 제 색깔로 물들인다. 이렇듯 공원 속의 나무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제각각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뽐낸다. 그래서 사실 어느 시점이 저 나무들의 리즈 시절인지는 알 수가 없다. 봄철에 하얗게 핀 벚꽃들을 보며 이 순간이 저 벚꽃 나무의 리즈 시절이라고 단정 짓다가도 겨울철에 소복이 쌓인 눈과 앙상한 벛꽂 나뭇가지를 보며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는 처절한 미를 느낀다. 사시사철 계절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젖다가 어느 순간 리즈 시절에 대한 의미를 잊어버린다. 사실 자연 앞에서는 객관적인 잣대와 관점이 의미가 없다. 계절이 변하는 것과 상관없이, 시들어가는 것과 상관없이 나무들은 봄이 오면 꽃을 피우며 가을이 되면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다음 기회를 노린다. 오직 사람만이 나이에 연연하며 자신의 리즈 시절은 젊은 시절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나의 리즈 시절이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나의 아이 시절은 삶에 찌든 어른들의 한숨과 대학생 오빠와 언니들의 시위 속에서 너무도 해맑았고, 나의 십 대 시절은 새삼 알게 된 진실 속에서 암울했다. 나의 이십 대는 IMF로 직장을 구하고 내 살기에 바빴고, 나의 삼십 대는 두 사내 녀석들을 아웅바둥 키우며 나를 살필 수 없는 기간들이었다. 다시금 접어든 사십 대의 시절, 이 시기를 나의 리즈 시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전의 시절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헤매던 시간들이라면, 지금부터 시작되는 40대의 시절은 그동안 묻혀왔던 질문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시기이다. 이런 나의 리즈 시절을 언제라고 정의 내리면 좋을까?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주어진 삶의 시간이 있다. 삶의 끝을 향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향해 가는 시간의 걸음들은 다 똑같지만, 유독 사람만이 그 줄어드는 시간들에 조바심을 많이 느낀다. 그런 영향으로 조금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모든 일을 다 이루려고 한다. 어쩌면 자기 인생의 리즈 시절은 과거도 아니요, 지금이 아닌데도 자꾸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앞으로 할 수 있는 기회들을 자꾸만 저 버리려고 한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데도 말이다. 자연에 자리 잡은 나무조차도 자신의 리즈시절을 왈가왈부하지 않는데 왜 나는 자꾸 리즈 시절을 젊은 시절의 모습에만 목 박아 두고 있을까? 리즈 시절은 계속 도전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보석 같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