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괴짜 친구, 파레아나를 이해하다

by 하늘진주

엘레나 H. 포오터의 소설, <파레아나의 편지>의 주인공 파레아나는 극단적인 낙천주의자이다. 이 소설은 ‘폴리애너’라는 이름으로 만화영화로 방영되고 다른 순정 만화와 순정소설의 여러 가지 버전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표현 매체인 책과 영화는 각각 달라도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보여주는 행동 방식은 비슷하다. 파레아나가 지닌 극단적인 ‘초 긍정주의’ 성향 말이다. 어쩌면 얼마 전에 종영한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여주인공 ‘나희도’의 아이 버전이 바로 이 ‘파레아나’가 아닐까 싶다. 청춘 남녀의 풋풋한 사랑 결합을 간절히 원했던 시청자인 나에게 ‘슬픈 결말’로 배신감을 안겨 주었던 바로 그 드라마 말이다. (그래서 아직 그들의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만 내는 중이다.)


파레아나는 보이는 사람, 사물, 생각에 모두 ‘감사’라는 낱말을 덧씌우고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올 때마다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려고 애쓴다. 그녀의 이 방식은 목사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알려주신 것으로 그녀만의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한 비법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파레아나는 어린 시절 인형을 갖고 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다. 파레아나 아버지 교회에 기부되는 부인회 품목에는 인형은 없고 목발만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실망한 파레아나를 보며 인형이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목발을 갖고 놀면서 목발을 짚는 아이들의 심정을 생각해보길 권했다. ‘너는 불편한 목발 대신 건강한 두 다리가 있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보통 ‘긍정’의 반대말은 ‘부정’이라고 생각하지만, 파레아나의 긍정 회로에서 ‘긍정’의 반대말은 ‘또 다른 길 발견’이었다.


사실 파레아나의 방식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적어도 어린 시절의 단순했던 나에게는 그랬다. 눈앞에 놓인 ‘라면’이 아니라 ‘흰 밥’이 너무 먹고 싶은 상황에서, “아, 흰 밥만 먹으면 MSG가 없어 좀 심심한 맛일 텐데, 라면은 면과 국물까지 먹으니 반찬이 많이 필요 없고 너무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리 만무했다. 현실은 현실이고, 소망은 소망이었다. 당장 시험을 못 봐 혼날 일이 있는데 억지로 끼워 맞춘 생각과 말로 그 불안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릴 때 TV와 소설 속에서 ‘긍정의 말’을 내뱉는 파레아나를 볼 때마다 ‘저 애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매우 궁금했다. 아무리 ‘파레아나’처럼 생각하려 해도 내 생각 자체를 완전히 바꾸기가 너무 어려웠다. 싫은 건 싫은 거고, 불편한 것은 불편한 거였다. 어린 시절의 내가 느끼는 파레아나의 초긍정 사고는 ‘너무 뜨거운 물속에서 자꾸만 시원하다고 외치는 어른들을 바라볼 때의 그런 마음과 같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고집스러운 생각도 좀 바뀌긴 했다. 나만 알고 내 생각만 소중하던 어린 시절의 모습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면서 말이다. 당시 유행했던 ‘긍정 테스트’가 바로 ‘물이 어중간하게 채워진 컵’이었다. 요즘은 개별적인 성향과 마음을 중시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자기 계발’,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이루어진다’라는 ‘긍정적인 신념과 믿음’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참 강했다. 질문자는 물이 반쯤 채워진 컵 그림을 준비하고 물었다. “이 컵의 물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이 컵의 물이 반만 채워졌을까?’ 아니면 ‘이 컵의 물이 반이나 채워졌을까?’의 표현을 묻는 말이다.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의 말, 특히 ‘반’ 뒤에 어떤 조사, ‘만’과 ‘이나’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은 달리 평가되었다. ‘이 컵의 물이 반만 채워졌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성향, ‘이 컵의 물이 반이나 채워졌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성향으로 말이다. 그 당시의 어린 청년이었던 나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항상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진실한 표정으로 “물이 반이나 채워졌어요”라고 답했다. 속으로는 ‘왜 맨날 이런 질문만 할까?’ 툴툴거릴지 몰라도 말이다.


이제 남의 시선을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 ‘아줌마’가 된 요즘, 종종 ‘파레아나’의 초긍정 사고방식이 생각난다. 다시 돌이켜보면, 파레아나의 생각과 행동은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억지스러워도 괜찮고 가식적이어도 상관없다. 그저 마음 편하게 어둡고 칙칙한 현실을 애써 밝게 바라보고 즐겁게 살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는 ‘초긍정적인 말’ 이면에 가리려야 가릴 수 없는 슬픈 현실을 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희망은 욕망에 대한 그리움/‘기형도 산문집’ 서평>에서

"‘희망과 현실의 간극이 클 때 우리는 절망한다. 나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 치유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명절 인사처럼 '모든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억지 희망을 품고서, 강제적인 긍정 마음으로 이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몇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파레아나의 생각이 조금씩 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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