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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pr 10. 2022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다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역지사지)

  지금은 불타는 열정이 많이 식었지만, 한창 영어 공부에 공을 들릴 때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열정이 식었다기보다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 영어 실력에 이제 그만 꾀가 난 것일 수  있다. 코로나가 온 이후 대면 모임이 힘들다 보니 같이 영어 스타디 하는 사람들과도 자연스레 덜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는 해외로 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동안 하루 습관처럼 하던 영어 공부는 조금씩 접게 되었다. 그저 매일 새벽에 일어나 10분 정도 전화로 필리핀 강사와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정도로만 하루치 영어공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창 원서도 읽고 공부를 하던 시절, 꽤 재미있었던 표현이 바로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역지사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다)’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봐야 할까? 처음 이 표현을 보고 참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역지사지는 '입지를 바꾸어 생각을 가게 하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직설적으로 말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냄새나고 불편한 다른 사람들의 신발을 굳이 신어 보라고 권유하는 것 자체가 참 엉뚱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들이라도 내 신발이 아닌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의 결심이 필요하다. 그 신발이 누구나 신을 수 있는 앞이 뚫린 슬리퍼가 아닌 다음에는 말이다.

 

 우선, 너무 불편하고 두 번 째는 굳이 다른 사람의 신을 신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그 사람의 신을 신어 보라’는 서양 표현이 마냥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냥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입장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은데 왜 그 신발들을 신어야 할까? 신발을 신어 본다고 한들 그 사람 본인이 아닌 이상 그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한 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지사지’라는 표현을 쓰고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라’며 애써 권유하는 것은 그만큼 남의 입장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탓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기 위해서는 익숙한 내 신발을 벗고 다른 사람의 낯선 신발 속에 내 발을 넣어야 한다. 딱딱하고 거친 세계에서 지켜주는 안전한 보호막을 벗어나 생소한 다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 세계를 감싸던 내 고집을 버리고 온전히 다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생각을 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도,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이해하는 것도 말이다. 어떤 신발을 신느냐에 따라 사물을 보는 관점도 시야도 각각 다르기에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 혹은 ‘그 사람의 상황을 내 것처럼 온전히 알겠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어렴풋이 이해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그가 가진 감정과 생각이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는 너무 어렵다. 기존에 형성된 가치관과 기준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나의 상황과 나의 고민이 다른 사람의 상황과 고민으로 탈바꿈할 때 좀 불편하다. 흔히 우리가 사람들과 불편하고 힘들었던 일, 고민 상담을 할 때 흔히 취하는 방식이다. 처음 그렇게 “나도 그랬어.”, 혹은 “나는 그것보다 더 심했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서로 같은 상황을 겪었다는 동질감을 느끼다가도 대화가 모두 끝나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내 씁쓸해진다. 나의 고민과 그 사람의 고민은 결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어”라는 말은 처음에는 듣기 좋지만, 나중에는 내가 내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듣기 위한 것인지 헷갈린다. 너무 마음이 힘들 때는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고 그냥 툭 던지는 말이 더 위로가

간다. 힘든 일을 꺼낼 때는 그저 복잡한 속내를 받아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말이다.


 내가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본 들, 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발의 크기도, 눈높이도 모두 다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로 그 신발을 신었다 한 들 그 높이에서 보는 시선과 그 사람이 원래 보던 시선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


 얼마 전 국민의 힘 이준석 대표는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비판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아서 그렇다.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한 번이라도 이용했다면 그런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 국회의원은 전장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다른 국회의원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로 이준석 대표가 장애인의 신발을 신지 않아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잘 모르겠다. 이 대표가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한들 그 굳건한 생각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미 그는 이 시위를 본인의 입장에서 동감(同感)을 했지만 공감(共感) 하지 못하는 것이다. 동감은 내 입장에서 그 사람의 입장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라면, 공감은 상대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헤아리는 것이다. 지금 온전히 동감만 하려는 이 대표에게 그 어떤 신발을 신겨도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을 듯싶다.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라’는 재미있는 서양 속담은 사람들의 답답한 속내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역지사지’라는 의미라고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전장연과 이준석 대표’의 지하철 시위 논쟁은 서로의 신발을 바꿔 신을 생각도 의지도 없는 탓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이 대표는 굳이 그 신발을 신지 않아도 대충 안다고 버티고 있고, 전장연은 얼른 신어보고 답해 보라고 다그치는 중이다. 이미 안다면 다른 신발을 신을 의지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그런 사람에게 정말 다른 신발을 신으면 생각이 바뀔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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