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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pr 10. 2022

이름이 없어도 나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들, <긴긴밤>

<긴긴밤/루리 글 그림/ 문학동네, 2021>

<이름이 없어도 나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들, ‘긴긴밤/(루리 글 그림/문학동네, 202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추/꽃)


 유명한 김춘추의 시, ‘꽃’의 한 부분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린다는 것’은 단순히 ‘호명(呼名)’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무수한 사물들, 동물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에서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루리의 <긴긴밤/문학동네, 2021>은 참 이상한 책이다. 이 책의 첫 서문은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문을 연 화자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아버지들이 많았고, 지금부터 진행할  책의 서사는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라고 밝히고는 잠적한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화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러 편의 아버지들의 서사를 한참 거친 후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름 모를 알 하나, 이것을 보며 막연히 그의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그는 아버지들이 수많은 비극을 겪은 후, 책 중반에 와서야 삐쭉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들이 앞서 겪었던 슬픈 비극들이 없었다면 절대로 태어나지 못했을 ‘나’. 그는 ‘태어나자마자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p80)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p80) 사명을 부여받는다. 화자는 원래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이름 없는 ‘작은 알’이었지만 여러 아버지의 피, 땀, 눈물, 소망을 담아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는 단 하나뿐인 작은 펭귄으로 탄생했다.


 또한 이 책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러 동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이 누구일 지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의견이 부분할 것 같다.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대로라면, 독자들은 책 마지막 서사를 완성하는 작은 펭귄 ‘나’를 주인공이라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에 읽었던 여러 아버지들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자꾸만 아른거려 그 결정을 남에게 자꾸만 미루고 싶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동화이다. 동화이면서 동화가 아닌 것 같은, 세상에는 주인공은 단 한 사람이 아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라고 외치는 책, 그런 이상한 동화이다.


 화자의 첫 번째 아버지 노든은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코뿔소이다. 그는 뿔 사냥꾼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우연히 만난 친구 치쿠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를 끝까지 보호하는 동물이다. 노든은 인간들에게 대해 불타는 복수심이 있지만, 그 마음 때문에 친구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품에 있는 어린 생명이 마땅히 있어야 할 안전한 곳을 찾아 주기 위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바다를 향해 간다. 노든은 세상에서 오직 마지막 하나 남은 존재’의 무게감과 고독을 그 한 몸으로 느끼면서도 여전히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존재’의 무거움과 사랑과 책임감을 알려주는 아버지였다.


 두 번째 아버지, 윔보는 치쿠의 단짝이다. 오랫동안 부상으로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치쿠의 오른 눈이 되었다. 그는 친구와 함께 주인 없는 알을 품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걱정보다는 알에 대한 사랑이 더 컸’ ‘쉬지 않고 알에게 말을’(p43) 거는 천생 아버지였다. 윔보는 딱 하루, 치쿠와 알을 품을 차례와 위치를 바꾼 것 때문에 커다란 철봉에 깔려 죽었다. 난데없이 일어난 전쟁 같은 소란 통에도 알을 감쌌던 윔보 덕분에 ‘나’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끊임없이 베푸는 아버지 윔보덕분에 말이다.


 세 번째 아버지, 치쿠는 죽어가는 친구 윔보를 바라보며 오로지 함께 품었던 알을 살리기 위해 동물원에서 도망쳤다. 그는 노든을 만나자마자 “만약 내 알에 흠집 하나라도 생겼다면, 그 멍청한 눈알을 다 쪼아 버렸을 거야.”(p53)라며 살기를 내뿜었지만, 그건 알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부성이었다. 그래서 치쿠의 부성은 좀 더 현실적이고 날 것의 부성이다. 그는 부화되지 않는 알을 쳐다보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매일 알을 걱정하며 부족한 자신 때문에 알에 문제가 있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친구 윔보의 죽음에 부채 감마저 가진 치쿠는 악몽을 꿀까 무서워 쉽게 잠이 들지 못한다. ‘그렇게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p57)고 말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긴긴밤’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들의 걱정과 고민들이 지속되는 밤이다.


 ‘나’는 이런 아버지들의 사랑과 희생이 없었으면 결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는 비록 이름이 없지만 그의 존재는 단순한 이름으로 정의 내리기엔 너무 특별하다. 그래서 첫 번째 아버지인 노든도 화자의 이름을 짓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왜 자신은 이름이 없냐는 화자에게 이렇게 답한다.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선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p99)


 이런 노든의 대답에 화자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불운한 알에서 태어났지만 무척 사랑받는, 행복한 펭귄이었다.”(p99-100)라고.


 <긴긴밤>은 독자마다 나를 찾는 성장, 생명 존엄, 연대, 동물 인권, 사람들의 욕망 등 다양한 각도에서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와 한 생명체를 둘러싼 아낌없는 사랑으로 읽었다. 이름이 없어도 나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준다며 그 어떤 세상과 도전이 무서울까. 그 덕분에 이름 없는 펭귄은 이름이 있는 존재보다 더 강하게 성장한다. ‘절벽을 오르다 수백 번을 미끄러져도 여기저기 멍이 들고 상처가 생겨도’(p122-123)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기어이 절벽 꼭대기에 올라 그와 함께 여러 아버지들이 오고 싶었던 바다를 바라보며 아버지들의 삶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다. 이름 없는 펭귄은 스스로 존재 가치를 세우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p125) 준비를 마쳤다.


 이 책은 초등 고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제작되었지만, 그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이유가 바로 처음에는 이 책을 아이들과 같이 읽었다가 나중에는 홀로 읽으며 눈물로 긴긴밤을 지새웠다는 성인 독자들의 리뷰가 많은 까닭이다. 생명과 존재의 가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들, 세상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찾아서 긴긴밤을 지새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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