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진주 May 18. 2022

꿈을  유지하는 원동력

낙천성의 두 얼굴

 얼마 전에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이 책은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자연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19세기 과학자, 데이비드 조던의 삶을 다룬 에세이다. 저자 룰루 밀러는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랑을 잃고 삶의 끝자리에서 데이비드의 일화를 읽는다. 그녀는 그가 지녔던 물고기, 자연계 질서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 호기심을 느끼고 지난 발자취를 끈질기게 좇는다.


 데이비드의 정식 이름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다. 밤하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기를 좋아했던 데이비드는 가운데 이름을 ‘스타’를 골랐고 그 이름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초대 총장이기도 한 그는 자연계에 질서를 만들고 등급을 부여하는 것을 숙명으로 생각했다. 그는 엄청난 낙천성의 방패로 둘러싸인 인물이기도 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도 데이비드는 언제나 웃으며 견뎠고 항상 다른 탈출구를 만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저자는 초반에는 ‘엄청난 낙천성의 소유자’라 여겼고, 나중에는 ‘과도한 자기기만을 지닌 자’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가 가졌던 낙천성, 혹은 자기기만은 곤경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도 가지고 싶어 하는 회복탄력성과 유사하다. 자기기만은 사실이 아닌 일에 대하여 혹은 반대되는 증거가 충분히 있는 일에 대하여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합리화하고 믿고자 하는 경향이다. 이른바 자신이 가진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의견이 맞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 개념이다. 그에 반해 회복탄력성은 실패나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원래의 안정된 심리적 상태를 되찾는 성질이나 능력이다. 이 의미의 주요한 요점은 실패나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것에 있다. 만일 자신의 현재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자기기만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요즘 사람들은 회복탄력성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실패나 어려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는 능력, 이미 성공의 사다리에 오른 사람들은 이 회복탄력성이야말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이라고 말한다. 예전의 나도 이 회복탄력성의 광적인 신봉자였다. 옛날부터 읽었던 자기 계발서 책들만 생각하면 난 이미 낙천주의자 달인의 경지에 올라야 했다. 그 책들을 읽는 동안 매번 ‘우주의 힘’에 빌었고, ‘나’를 믿었고, ‘부정적인 면보다는 항상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려 노력했다. 책 속에 나왔던 사람들의 상황(감옥, 실직자 등) 보다 나은 상황에 있는 것은 안심하며 무수히도 많은 ‘치즈’며 ‘마시멜로’를 모았다.


 하지만 그 책들을 덮고 나면 항상 내 모습은 그대로였다. 기분이 커다란 구멍으로 파고 들 때면 항상 남의 성취와 비교하는 ‘지질한 ’가 나타났고, 도전하기 전에 미리 결과부터 예측하는 ‘소심한 ’가 있었다. 이야기하다가도 딱딱한 표정을 짓는 상대방을 보면 ‘내가 뭘 잘못했나?’라고 ‘걱정하는 ’가 있었고, 미리 앞서서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착한 내’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자기 계발서의 저자들이 떠드는 목소리에 따라 무작정 따라가다가 항상 벽에 부딪혔다. 예전에 내가 좇으려 했던 것은 회복탄력성이었을까? 아니면 자기기만이었을까?


 안타깝게도 나 자신은 데이비드 스타 존슨처럼 강력한 낙천성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매일 딱딱한 긍정성의 갑옷으로 하루하루를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훅 들어오는 현실적인 공격에는 매번 쉽게 무너졌다. 특히 나 자신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공격, 평가하는 공격들은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꿈을 계속 꿀 수 있는 원동력, 그건 과연 무엇일까?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가 계속 위대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을 ‘과도한 낙천성’이라고 말했고, ‘자기기만’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절대 굽히지 않았고 항상 ‘불사조’처럼 되살아났다. 물론 그의 강한 신념이 현실 속 다른 사람들에게 결국 좋게 작용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그와는 다른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만으로도 계속 자신의 꿈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만약 미리 자신의 결과를 알게 된다면 그 꿈을 계속 이어갈까? 이미 목표의 산봉우리에 올라도 앞으로 더 오를 산봉우리가 여전히 많다는 것을 알면 어떤 선택을 할까? 수많은 의문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꿈꾸는 사람들 앞에는 항상 두 가지 길이 존재한다. 이쪽으로 가볼래? 아니면 이만 다른 길을 선택할래?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20대 중반에 실의 빠져 지은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사실 그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잘 모른다. 모르니까 그냥 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내 선택들, 그중에는 아직도 후회로 남아 있는 것들이 참 많다. 생각해 보니 가장 후회했던 일들은 이리저리 망설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포기했던 일들이었다. ‘그냥 할 걸, 그냥 해 볼걸.’이라는 말들만 매번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는 결과와 상관없이 꾸역꾸역 나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일은 항상 좋은 결과만 얻을 수는 없겠지만, ‘그냥 해 볼걸’이라는 후회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이 아닐까? 그래, 일단, 도전!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수업을 만드는 첫 번째 조건, 사람에 대한 믿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