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것이 가지는 힘

by 하늘진주

멍하니 마우스 커서가 깜박거리던 컴퓨터 모니터의 빈 화면을 응시한다.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짧은 여행의 후유증인가? 그러다 잠시 거실 주변을 둘러본다. 막 뜸이 들기 시작하는 밥솥, 그 소란 속에서도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가족들, 다시 돌아온 듯한 일상의 흐름 속에서 아직 정리하지 않는 2박 3일 동안의 여행 가방이 거실 복판에 나 뒹굴어져 있다. 괜히 서둘러 정리했다가는 다시 팍팍한 현실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최대한 미루어 두었던 짐들이다. 어차피 반복적인 현실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잘 알지만 차가운 이성과 놀고픈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제 내게 남은 여유 있는 시간은 겨우 이틀, 게으른 감성은 자꾸만 여행의 짐 정리를 미루며 ‘놀아’라고 소리친다. 이런 호사, 언제 다시 누릴 것이냐며.


컴퓨터의 빈 화면, 깔끔하게 정돈된 빈 공간, 모든 잡념이 사라진 마음가짐…. 이런 ‘빈 것’들이 주는 힘은 강하다. 모든 시작과 출발은 빈 공간에서 시작된다. 작품을 쓰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집안의 정리 정돈도 하다못해 나를 몇십 년간 애먹이는 다이어트도, 비우지 않으면 다시 채우지 못한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고 내게 부족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비우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비움이 주는 힘은 강하지만 또 다른 두려움이기도 하다. 특히나 나처럼 이런저런 물건들과 책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힘들다. 하다못해 짧은 여행의 나른한 여운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꾸만 짐 정리를 망설이고 있다.


사실, 이번 여름휴가 여행이 특별하지도 독특하지도 않았다. 강원도에서 숙박하는 내내 비가 내려 할 수 있는 야외 활동이 많이 없었다. 간간이 예쁜 카페를 찾아다녔고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멍 때리는 일차원적인 활동 일색이었다. 게다가 묵었던 침실은 온돌방이라 이부자리를 깔지 않으며 계속 허리가 아팠다. 평소 하는 활동, 일정에 비하면 너무도 단순한 활동들이었지만,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얽혀 있는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신없이 일하다 가족들의 일정에 맞춰 끼니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좋았고 만족스러웠다. 이번 휴가를 통해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많이 쌓였던 여러 가지 피곤과 짜증들을 많이 비워냈다.


여행을 가기 전의 나에게, 빈 공간, 빈 것은 채워야만 하는 스트레스 일거리, 그 자체였다. 컴퓨터의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볼 때는 어떻게 한 페이지의 글들을 채워야 할지 막막했고, 빈 일정표를 바라볼 때는 어떤 일정으로 채워야 할지 고민했다. 일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비우고 나른한 게으름들을 채워온 지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닿치면 하고 안되면 할 수 없다는 막무가내 정신뿐이다. 여행 전에는 하나하나 각각의 모든 일이, 인간관계들이 다 소중했지만, 지금은 오직 나와 가족들만 보일 뿐이다. 그물망처럼 얽혔던 과거의 일들이 여행의 칼날로 산뜻하게 잘려 나갔다.


다시금 컴퓨터의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금씩 타자를 쳐 본다. 몇 분 동안 생각나지 않았던 글들이, 생각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각각 생각의 귀퉁이를 하나씩 붙잡고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 비워두었던 공백이, 채워두지 않았던 공간이 좋은 양 끊임없이 재잘거린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인가 보다. 빈 공간, 빈 것은 연속성을 가진 무한한 힘이다. 공백은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는 무한한 도돌이표이기도 하다. 그 힘을 밑거름 삼아 다시금 오늘 하루, 앞으로 채워질 시간들을 계획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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