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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을 아는 나의 수세미

by 하늘진주

아침 설거지를 하다 문득 오른손을 내려다보니 엉기성기 엮어진 그물 모양의 수세미가 보인다. 기름기가 없는 그릇들을 대충 물로만 씻으려는 귀찮아하는 마음 덕분에 오랜만에 수세미의 민낯을 본다. 펼치면 A4 크기, 뭉치면 야구공 크기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변형시키는 이것은 설거지의 필수품이다. 아무리 꾸덕꾸덕하게 메말라 있는 밥그릇의 밥풀도 물에 잠시 담가 둔 뒤 수세미로 훔치면 금방 사라진다. 둘째가 먹던 그릇의 시리얼 자국, 남편이 마시던 우유 컵의 잔상들이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물과 수세미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흩어져 간다. 착착 펼쳐서 싱크대에 놓인 수세미 전용 고리에 널어놓은 물이 조금씩 빠져나간다. 이제 이 노란 수세미는 또다시 찾아올 힘겨운 노동을 기다리며 잠시간의 휴식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언제부터 이 노란 망사 수세미를 사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방의 일상은 끼니마다 음식을 하고 치우고 설거지하는 지루한 반복이다. 나는 음식들이 토해내는 흔적에 따라 다양한 수세미를 사용했다. 기름기가 없는 그릇들을 씻을 때는 촉감이 좋은 말랑한 수세미를 선호했고, 음식물 찌꺼기로 잔뜩 눌어붙은 그릇을 씻을 때는 철 수세미로 빡빡 문질러야 속이 시원했다. 물론 대부분 식기를 씻을 때 사용하는 수세미는 이 노란 망사 녀석이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딱 맞는 수세미를 찾기 위해 참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예전에 사용했던 수세미는 여름에도 세균이 잘 번식하지 않는다는 아크릴 소재의 수세미였다. 딸기 모양, 수박 모양, 토스트 모양 등등 다양한 생김새를 지녔던 터라 꽤 오랫동안 고집하며 사용했다. 그러다 오리고기와 삼겹살의 기름기로 누렇게 변한 수박 수세미의 잔혹한 모습을 본 이후로 다른 수세미로 재빨리 바꿔 탔다. 그동안 ‘주위 엄마들의 입소문에 따라’, ‘친환경에 좋다는’, ‘세제가 필요 없다는’ 등등 다양한 이유, 여러 상황에 따라 각양각색의 재질과 모양의 수세미들이 주방에 자리 잡았다가 사라졌다. 그 후 최근에 바꾼 수세미가 바로 요 노란 망사 녀석이다.


노랑 망사 수세미의 가장 좋은 점은 설거지 후, 빠른 건조이다. 제아무리 수세미를 오래 물에 담가 그릇들을 설거지해도 다 끝난 후 고리에 걸어두면 5분~10분 안에 물기가 싹 마른다. 강한 햇빛에 따로 시간을 내어 자연 소독하지 않아도, 뜨거운 물에 팔팔 끓여 살균 소독을 하지 않아도 이 수세미는 스스로 물기를 덜 어내며 다음 준비를 할 줄 안다. 이 녀석은 오직 다음 설거지 순간만을 생각하며, 얌전히 고리에 걸린 채 잠시의 휴식을 취한다. 스스로 묵묵히 기다림을 즐길 줄 아는 기특한 녀석이다.


다시 한번 수세미를 살펴보니, 벌써 여기저기 노란 실밥들이 덜렁거린다. 그물 모양으로 엮어진 매듭 곳곳에 살짝 풀릴 듯한 이음새가 눈에 띈다. 길어야 한 달, 어쩌면 더 빠른 기간에 수세미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빨리 해져 버렸을까? 문득 며칠 전에 가족들 먹인다고 고기를 한차례 구웠던 생각이 난다. 내 가족들 배불리 먹이느라 그 이후의 노동에 힘겨웠을 수세미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요 녀석은 고기를 굽고 난 진득한 노란 기름때의 그릇들을 따가운 주방 세제로 범벅이 되어 씻느라 몇 차례나 뜨거운 물 샤워를 맞았다. 그 저녁 식사 그릇들을 다 씻고 난 후, 한없이 말랑해진 수세미는 노곤한 피곤함에 젖은 패잔병처럼 고리 위에서 힘없이 팔랑거렸다.


점심을 먹기 전, 잠시의 휴식을 즐기는 시간, 수세미가 느끼는 기분은 무엇일까? 앞으로 다가올 노동에 대한 고단 함일까? 아니면 자기 몫의 일거리가 있다는 안도감일까? 바람에 조금씩 팔랑거리는 수세미를 바라보며 함께 잠시간의 휴식을 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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