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난히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 한 지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요즘 수험생 큰 애와 입시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똘똘했고 유난히 수학과 과학을 잘해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엄친아’(엄마친구아들)였다. 그녀는 평소에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런 아들을 아주 뿌듯해했다. 열심히 일하며 아들을 뒷바라지했고 그가 원하는 학원이라면 무조건 보냈다. 이제 결실을 보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아쉽게도 그 아들은 그녀의 기대만큼 좋은 성적을 갖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근래 서로 모진 말까지 주고받았으며 한바탕 싸웠다고 했다.
평소 그녀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커 보였다. 겉으로는 ‘아니’라며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주워듣다 보면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들의 공부 방법에 대한 불만이었다. 분명히 새벽 2시까지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듯한데, 효율적으로 과목을 관리하지 않는다며 속상해했다. 원하는 학교로 가기 위해서는 아들이 싫어하는 과목들도 과외든 학원이든 뭐든 시켜야 하는 데 도대체 아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몇 번이고 아들에게 잔소리하다 나중에는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워라”라는 말까지 내뱉었다고 했다.
그녀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저 아들의 소심함을 걱정하는 평범한 엄마였다. 그러다 그녀는 큰애가 점점 수학과 과학에 두각을 나타내고, 대한민국 엄마들이라면 원하는 학교로 가겠다고 선언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그녀는 너무 많은 기대를 아들에게 품었고 원했다. 매일 열심히 일해서 학원비를 댔고 계속 아들을 관리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많은 기대는 아들을 점점 지치게 했고 둘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졌다. 그 이후 그녀는 종종 이렇게 이야기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엄마가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잔소리 몇 번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됐냐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무엇이 정답이고, 무엇이 오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로에 대한 너무 많은 기대는 스트레스와 부담감, 그리고 깊은 생채기만 남길뿐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가족들 사이의 모든 갈등과 행동들을 살펴보며 안 좋은 일들은 너무 많은 기대에서 시작되었다. ‘넌 장녀니까 이 정도는 희생해야지.’ ‘넌 내 자식이니까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얼마나 베풀었는데 그러면 지금은 되돌려 줘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에게 품었던 너무 많은 기대는 그것을 되돌려 받지 못할 때 분노와 함께 강한 미움으로 상대방에게 쏟아진다. 그것도 도저히 견디기 힘든 아픔과 슬픔으로 말이다.
이 일은 비단 부모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에게는 부모님에 대해 일정한 ‘프레임’을 씌운다. 대중매체에서 만들어 내고 미화한 자신에게 헌신적인 부모님의 이미지를 본인의 부모님에게 덧씌운다.
‘부모님은 당연히 나를 이해해 줘야지’, ‘어떤 일인지 먼저 물어봐 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것 아니야?’, ‘부모님이니까 무조건 내 편이어야지.’
하지만, 이런 일은 그저 본인의 상상일 뿐이다. 부모님이라도 항상 헌신적일 수 없고 공평할 수 없다. 많은 자식 중에서 정이 가고 의지가 가는 큰아들이 있고, 막내가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는 속담은 맞지만, 유달리 아프고 마음이 가는 손가락들도 있다.
생각해 보면, 요 몇 달 동안 기대로 인한 우울한 감정들에 휩싸여 지냈다. 부모님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고, 나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 일은 나비 효과처럼 온 가족들을 뒤흔들었고, 지금도 가족들 관계는 아슬아슬하게 삐걱대며 흔들리고 있다. 사실, 나 역시도 부모님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부모님들 역시 나에 대해 많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불편한 일은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찍부터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가족에서의 ‘나의 위치’를 냉정히 분석하여 큰 기대를 품지 말아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리어왕에도 부모 자식 사이에 ‘너무 많은 기대’와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80세 넘은 리어왕에게는 아름다움 세 딸이 있었다. 그는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세 딸에게서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다. 먼저 아첨 어린 말로 그를 기쁘게 해 준 큰딸과 둘째 딸은 각각 나라의 1/3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코델리아는 “자식의 도리로 왕을 사랑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답해 왕의 미움을 샀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당시만 해도 코델리아의 이런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녀 역시 너무 많은 기대로 서로에게 부담을 주고 지우는 그런 관계를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나름의 해석을 해 본다. 너무 많은 기대는 행복을 저 멀리 쫓아낼 뿐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은 그만하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 주면 기쁘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 내 인생이 잘못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부모님이라도, 아무리 내가 낳은 자식들이라도, 아무리 내가 선택하고 사랑하는 남편일지라도 그들의 인정과 사랑만이 내 존재를 빛내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존재로 빛나고 훌륭한 사람이다. 부모님은 부모님 인생, 아이들은 아이들의 인생이다. 남편도 남편의 인생이다. (하지만, 같이 늙어가는 처지니 일단 내 편으로 넣는다) 다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품지 말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