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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14. 2022

조바심을 없애면 보이는 아이들의 진실

“엄마, 제가 알아서 다 할게요.”

 난데없는 아빠의 회식 문자를 보자마자 중3인 둘째가 한 말이다. 남편의 회식? 사실 매일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다 보니 이런 문자를 보면 솔직히 반갑다. 하지만, 남편이 회식하면 참 곤란한 날이 있는데, 그날은 바로 아파트 분리수거 일이다.


 원래 분리수거 일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남편이 도맡아서 하다가 아이들이 초등생이 되면서 세 부자가 나누어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큰 애가 기숙사 학교로 가면서 조금 노동량의 변화가 생겼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큰아들이 ‘내년에는 저도 고3 수험생이니 1년 반 정도는 모든 집안일에서 손 떼게 해 달라’고 선언을 했다. 이렇게 오직 남편과 둘째가  일주일에 한 번 분리수거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회식’으로 늦게 온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었다.


 부엌 베란다에 쌓여있는 분리수거 일거리를 한숨을 쉬며 바라보다 ‘에이, 이번에는 나도 나가야겠군’이라고 마음을 먹은 찰나, 둘째가 말했다. “엄마,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러더니 정말 분리수거 때 사용하는 손수레를 꺼내더니 산처럼 쌓여있는 묵직한 신문지 더미며, 플라스틱, 종이상자들을 척척 옮기기 시작했다. 두 번 정도 분리수거장까지 갔다 왔다 하면서도 엄마에게 ‘제가 알... 아서 할게요. 에구구’라며 장난을 칠망정 특별히 기분이 상해 보이지 않았다.


 분리수거가 다 끝난 후, 너무 신기한 마음에 아들에게 물었다.

 “그냥, 아빠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왜 혼자 다 했니?”

 “아빠, 술 드시고 오시면 분리수거하기 힘드실 테니까요. 그럴 바에는 그냥 제가 혼자 하는 게 나아요.”

 ‘고 녀석, 언제 저렇게 컸을까?’


 종종 말이 잘 통하는 큰 애에게 둘째에 대한 고민을 나누곤 한다. 주로 둘째가 시험을 망쳤을 때나 밤늦게까지 게임만 하고 있을 때이다.

 ‘동생은 왜 저렇게 게임만 할까?’, ‘좀 스파르타식으로 공부를 많이 시키는 학원으로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 때마다 큰 애는 자꾸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아직 성적이 오르는 재미를 못 느껴서 그러니 기다리라’라고만 말이다. 아마 이런 점은 아빠에게서 배운 걸까?


 사실 이런 관점은 남편도 같았다. ‘잔소리’보다는 ‘기다리고’ 그러다 안되면 ‘아이가 좋아하는 방향’을 찾아주면 된다고 말이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일정한 양 이상의 공부를 시킬 때면 꼭 제동을 걸었다. “이 정도면 됐어. 너무 많이 시키면 아이들이, 나중에 번아웃이 올지 몰라. 이제는 쉬어야지.”라고 말다. 이미 주위 아이들이 ‘많은 선행학습’을 하며 멀리 달려가고 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그런 남편의 느긋한 방식이 매우 답답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힘들다는 아이들의 사춘기 시절이 이렇게 평화롭게 지나는 데는 남편의 교육 방식이 많이 도움이 된 듯싶다.

 

 큰 애의 사춘기도 마냥 편했던 것은 아니다. 집에서는 너무도 착하고 어리광 부리는 아들이었지만 당시 다니던 학원에서는 원장님과의 갈등이 아주 심했다고 했다. 학원 원장님은 아들이 ‘학원의 명예’를 높여 줄 것이라고 남다른 기대를 품고 있었다. 볼 때마다 자꾸만 그 이상의 것을 해내라고 아들을 밀어붙이며 체벌 비슷한 행동까지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네 부모님도 이런 성과를 원할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했다. 그때 아들은 ‘우리 부모님은 절대로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은 안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후 난 바로 그 학원을 끊었다. 그리고 더 빨리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나를 무척 원망했고 왜 그 원장님은 상의하지도 않은 일로 아들을 힘들게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다고 느꼈던 중고등학생 시절을 잘 지나고 있다. 물론 아직 고3은 지나지 못했지만, 왠지 우리 아이들은 잘 보낼 것 같다. 아니,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다짐이다. 특별히 우리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나거나 내가 아이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가 아니다. 그냥 아이들을 바라볼 때 겉보기에 숨겨 놓은 이면을 살짝 들여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매번 아이들에게 느끼던 조바심 나는 마음과 서두르는 말을 걷어내고 보니 진실이 보인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들이 “조금 있다가 할게요.”라는 정말 조금 있다가 하겠다는 말이다. 지레짐작으로 “너 또 그렇게 해 두고서 나중에 안 하려고 그러지?”라며 미리 결론을 짓고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

 “열심히 외웠는데 내가 공부한 부분에서는 안 나왔어요.”라는 말은 진짜 그 대목에서 안 나와서 안타까웠다는 말이다. 그 말을 두고서 “진작 공부를 하지, 내가 너 매일 게임만 붙들고 있을 때부터 알았다”라고 잔소리할 일이 아니다. 그냥 그 말을 믿어주면 되었다. 무심코 하는 말, ‘우리 애는 공부를 안 해서 큰일이에요.’, ‘대학에 잘 갈련지 모르겠어요.’, ‘**은 좋겠어요. 공부를 잘해서….’ 좀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 걱정으로 나온 말들이, 그런 잔소리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무수한 생채기를 남긴다.


 아이들은 자신의 속도로 자기의 길을 잘 찾아갈 수 있다. 단지 순간순간 믿지 못해서 내뱉는 부모의 말들이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말이다. 남편과 큰 애가 둘째를 위해 하는, ‘그냥 기다리면 돼요.’, ‘알아서 잘할 거예요.’라는 말은 정말 기다리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조금 둘러 가더라도 조바심 내지 말고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다 보면 둘째는, 아이들은 자신의 길을 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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