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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28. 2022

새벽에 고구마를 찌다

 새벽에 남편을 보내고 부엌 베란다에 나가 보니 반도 채 먹지 못한 고구마 한 상자가 보인다. 시골에 계시는 시부모님이 정성껏 농사지으신 소중한 작물이다. 고구마 한 상자 가득 받을 때는 허리를 조아리며 한껏 감사함을 표하며 가져왔는데, 여러 번 쪄서 먹고 나니 금세 물린다. 치킨, 빵, 과자, 과일 등등 다른 먹거리들을 먹느라 부엌 베란다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고구마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어제 아침, 어머님이 또 다른 고구마 수확을 하셨다며 한 상자 더 보낸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코, 어쩌나! ‘저번에 보낸 고구마를 다 먹었냐?’라는 어머님의 물음에 재빨리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거의 다 먹어간다’라 대답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아차’ 싶다. 저 많은 고구마를 다 어찌할까?


 매번 과자만 입에 달고 다니는 사춘기 둘째 녀석을 먹일 겸, 새벽에 큼직한 까만 냄비에 고구마를 넣어 찌기로 했다. 얼른 고구마 상자를 비울 요량으로 토실토실하게 굵은 고구마들만 잔뜩 골라 삼발이 찜 채반에 넣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무리 센 불로 냄비를 달궈도 고구마가 익을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보통은 20분에서 30분 정도 센 불로 끓이면 맛있는 노란 고구마 속살을 맛볼 수 있는데 오늘따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가만히 냄비를 살펴보니 뚜껑 사이로 뜨거운 김이 다 새어 나온다. 너무 욕심내어 냄비가 수용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고구마들을 넣은 탓이다. 모든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고자 하는 내 조급함과 욕심 때문에 아까운 시간과 물만 낭비되고 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냄비의 뚜껑이 닫힐 만큼 적당히 담아서 고구마를 쪘다면, 좋았을 텐데...... 항상 이 조급함, 욕심, 무엇이든 빨리 해치우려는 마음이 문제다.


 얼마 전에도 둘째와 실랑이를 벌였다. 뭐, 사춘기 사내아이와 엄마가 공부로, 생활 습관 등등으로 다양한 이유로 감정을 붉히는 일은 부지기수다. 유독 난 둘째와 옷 문제로 서로 다투는 일이 많다. ‘만년 츄리닝 한 벌’로 봄·여름·가을·겨울을 보내는 둘째에게 옷을 사 입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매번 옷 가게에 데리고 가도 그 녀석이 고르는 옷은 항상 몸에 편한 운동복이다. 둘째 녀석이 외모에 관심이 없는 탓일 수 있고 혹은 사춘기에 들어 유난히 찐 살 덕분에 맞는 옷을 찾기 어려운 탓일 수 있다. 그래도 엄마 마음에는 깔끔하게 보이는 카라 달린 옷도 입혀 보고 싶고, 활기차 보이는 청바지도 한번 입혀 보고 싶은데 그 녀석은 자꾸만 인상만 쓴 채 내 요구만 거부한다.


 지난번 아들과 감정 소모를 한 일도 역시 옷 때문이었다. 둘째의 방을 청소하다 너무 텅텅 비어 있는 옷장과 서랍을 발견했다. 안 되겠다 싶어 토요일 저녁 농구 수업이 끝난 아들을 동네 주변에 있는 큰 마트의 옷 판매장으로 불렀다. 역시 그 녀석이 고른 옷은 운동복 바지였다. 그 바지와 잘 어울리는 윗옷을 골라주려는데, 그 녀석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다. 아들 특유의 ‘나 이제 짜증내기 직전’이라는 신호이다. 아들의 그런 기색을 힐끗 살핀 남편이 바로 “이제 충분하다”라며 나와 둘째의 손을 끌고 매장을 나선다. 충분하기는 무슨, 아직 몇 벌 입혀 보지도 못했구먼. 그 녀석에게 좋은 옷을, 다 아들이 좋으라고 하는 일에 왜 그렇게 어깃장을 부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며칠 동안 삐친 마음에 둘째에게 입을 꾹 다문 채 쌀쌀맞게 굴었다. ‘엄마가 아들을 위해서 옷을 골라 주겠다는데, 다 자기 잘 되라고 하는 일인데 말이야.’ 억울한 마음에 한동안 속으로 구시렁거리다 ‘그래도 변명이라도 들어야겠다’라는 생각에 둘째에게 말을 건넸다. “아들아, 대체 왜 그런 거니?”


 둘째는 아빠와 같이 가서 옷을 사는 것, 고르는 것도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같이 가서 사는 사람이 엄마가 될 경우는 좀 힘들다고 말했다. 엄마는 항상 ‘한 벌’로만 만족하지 않고 ‘두 벌, 세 벌’, 어떨 때는 이미 지나친 옷 판매장을 다시 가는 경우도 있어 피곤하다고 덧붙였다. 너무 많이 옷을 입혀서, 너무 많이 신경을 써줘서 어떨 때는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둘째와는 유독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아니, 옷뿐인가, 사실 핸드폰 게임하는 것도, 유튜브를 켜 놓고 공부하는 것도, 세수하고 얼굴에 로션에 안 바르는 것도, 매번 놀다 숙제를 늦은 밤까지 하며 자는 것도 계속 나와 얼굴을 붉히는 일이 많았다. 그냥 ‘조금만’ 잔소리를 하면, ‘조금만’ 이야기를 하면 더 잘할 것 같은 생각에 둘째와 이야기하다 괜스레 감정이 북받치곤 했다. ‘나 혼자서 화를 냈다가’, ‘나 혼자서 실망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요동쳤다. 정말 나는 어떤 환상을 아들에게 덧붙이고 있었던 걸까?


 뚜껑이 잘 닫히지 않아 자꾸만 뜨거운 김들이 새어 나가는 고구마 냄비를 보니 둘째와 내 모습이 머릿속을 스친다. 아들이 허용할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는데, 내 욕심은 우아하게 안 그런 척해도 매번 그 양을 앞선다. 둘째가 받아들일 수 있는 ‘허용의 냄비’보다 더 많은 ‘내 욕심의 고구마’들을 잔뜩 넣는 것이 문제다. 처음부터 냄비의 뚜껑이 잘 닫힐 정도로 고구마를 넣고 삶았으면 이미 몇 분 전에 그 달콤한 속살을 베어 물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계속 익지 않는 고구마를 보며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욕심과 조바심, 기대감이 내 마음과 둘째의 마음을, 서로 힘들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조금씩 고구마들이 짙은 색깔을 띠며 익을 기미를 보인다. 괜스레 얄미운 마음에 젓가락으로 눈에 보이는 고구마를 푹푹 찔러본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고구마들이 조금씩 달콤한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가스레인지 앞에서 서성거리며 느꼈던 조바심들, 과한 욕심에 대한 후회들이 달콤한 고구마의 속살에 조금씩 사라진다.


 처음부터 냄비에 ‘적당히’ 고구마를 집어넣고 끓이면 ‘적당한’ 시간에 고구마를 맛볼 수 있다. 몇 분에 한 번씩 냄비 뚜껑을 열어 고구마 알갱이를 젓가락으로 찌르지 않아도 다 잘될 거라는 믿음과 여유를 가지면 맛있는 고구마가 완성된다. 욕심을 내지 않고, 조바심을 내지 않고, 고구마를 찔 때의 마음으로 아들을 대하면 된다. 더 이상 싸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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