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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14. 2022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 둘째의 결심

어제 갑자기 중3인 둘째가 달려와서는 아주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엄마, 저, 책상 위의 노트북을 치웠어요. 지금부터 시험 다 볼 때까지 노트북 안 할 거예요.”


 ‘아니, 이런 일이?’

 사실 지금까지 둘째와 노트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단짝과 같은 존재였다. 아들이 집에 있을 때면 책상 위 노트북의 전원은 하루 종일 꺼질 일이 없었다. 둘째는 매일 노트북에 켜 놓은 유튜브 게임 방송을 들으며 숙제를 했고, 캐릭터 그림들을 그렸다. 그런데 그 녀석이 시험 기간에는 ‘스스로’ 노트북의 전원을 끄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중딩인 둘째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은 엄마인 나와 그 녀석이 실랑이하기에 참 좋은 소재였다. 아들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노트북과 핸드폰을 ‘합법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코로나 팬데믹이 오면서 둘째와 ‘전자기기’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차근차근 의논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아들은 ‘학교 출석체크’와, ‘온라인 수업’을 위해 핸드폰과 노트북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녀석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컴퓨터와 핸드폰의 세계로 쉽게 빠져들었다. 둘째는 항상 책상에 앉을 때면 노트북을 커 두었고, 게임방송과 유튜브를 들으며 학교 숙제를 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현수가 쓴 <코로나가 아이들에게 남긴 상처들/2022/해냄>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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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로 인해 격변이 일어난 장소는 가정입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감염 전파를 막기 위해 실시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초기에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가정에서의 경험은 복잡하고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가정이 늘었습니다.(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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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마디로, 저자는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감염 전파를 막기 위해 실시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시간이 지날수록 가정에서의 경험은 복잡하고 힘들어졌다”(p.63)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부모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스크린 타임 때문에 아이들에게 독설에 찬 잔소리”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들이 “대화는커녕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김현수 저자는 아이들이 코로나 시기에 집에서 들었던 부모의 잔소리의 유형을 책 속에 정리해 두었다. 그들이 부모를 ‘여섯 가지 말밖에 모르는 감시자’라고 표현했다는 부분은 참 씁쓸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들이 밝힌 부모의 잔소리 내용들은 무척 공감이 가고 재미있다.


 <코로나 칩거 동안 집에서 흔히 듣는 한국말 여섯 가지-부모 편>


 -공부해라

 -책 봐라

 -스마트폰 보지 마라

 -밥 먹어라

 -차라리 자라

 -씻어라.


 <집에서 어머니에게 듣는 잔소리 응용 편>


 -공부 더 해라

 -다른 책 봐라

 -스마트폰 하면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밥 더 먹어라

 -빨리 그냥 자라

 -깨끗이 씻어라, 대충 씻지 말고.


 나 역시도 종종 사용했던 말들이다. ‘공부해라’ ‘책 봐라’, ‘빨리 그냥 자라’, ‘깨끗이 씻어라, 대충 씻지 말고.’ 등등


  아이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학교를 가는 요즘, 코로나 팬데믹 때와 겪었던 스트레스는 이제 거의 없다. 우선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 눈앞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모든 가족들이 득실거리며 집안을 활보할 때는 골방에 틀어 박힌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았다. 게다가 두 녀석이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참을 인’ 자를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새겼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 녀석들이 공부를 하는 건지, 노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유별나게 예민했던 나의 모습은 코로나 팬데믹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덜 상처 주면서 그 고난을 잘 견뎠다. 참 다행이다.


 아이들이 점점 커 가면서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많이 한다.


- 아이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못해도 그 ‘못마땅한 행동’에 대해서만 혼을 내고 마음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말은 절대 하지 말자.

-천사 같았던 어릴 때에 비해서 사춘기에 들면서 여드름이 생기고 뚱뚱하고 못 생겨져도 얼굴을 보면 무조건 “예쁘다”라고 이야기하자.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좋은 점 발견하면 ‘잘한다’고 이야기하며 안아주자.


 가끔 그 생각을 한다. ‘엄마인 내가 사랑해주고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예쁘게 봐줄까?’ 학교에서, 학원에서 아이들은 조금이라 잘하기 위해 용쓰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못 미더워도, 조금 부족한 점이 보여도 작은 점을 칭찬하며 숨겨진 가능성을 믿어주도록 노력해야지.


 어쩌면 둘째가 과감하게 시험 대비를 위해 노트북을 치운 것은 엄마의 그런 노력도 ‘아주 쪼금’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이제는 코로나 펜데믹의 혼돈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아무튼 참 다행이다. 스스로 그런 결심을 했다니 말이다.  아들,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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