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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언어에 귀 기울이기

by 하늘진주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 마음 챙김 온라인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다. 모든 일상을 망가뜨렸던 미지의 그 바이러스, 당시에는 명칭도 제대로 ‘코로나19’라고 붙여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알 수 없는 위험한 바이러스와 그것을 옮기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안으로 마음이 무척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저 ‘마음 챙김’이라는 말이 좋아서, 그저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어서 무작정 등록한 강좌였다.


사실 그 강좌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조언하는 것처럼, 조용한 곳에서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기만을 강조했다. 온몸의 감각을 민감하게 세우고 호흡, 근육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라고 말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한참을 그렇게 내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꼿꼿한 어깨와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나에게는 몇십 년째 지녀온 고질병이 하나 있다. 잘 구부러지지 않은 등 근육과 단단한 어깨 근육이다. 항상 필라테스 선생님은 내 어깨의 근육을 만져 보다 그 단단함에 놀라고, 아무리 등으로 올라오라고 부르짖어도 매번 목으로 모든 상체 운동을 다 해치우는 내 단순 무식함에 놀란다. 정말로 등으로 올라올 수 있기는 한 걸까? 매번 선생님이 복근과 코어 운동을 등으로 올라오라고 지시할 때마다 진심으로 궁금하다. “자, 등으로 올라오셔야 해요.”라고 선생님은 애타게 이야기하지만 내 등 근육은 항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길게 뽑은 목으로만 일어나 계속 움직이다 이내 지쳐서 털썩하고 바닥에 머리를 내려놓는다. 쿵! 그럴 때면 진짜 힘들고 아프다. 특히 목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빳빳한 등 근육과 어깨 근육을 가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회초년생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결혼 전 다녔던 회사는 섬유를 해외에 수출하는 작은 무역회사였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좋았지만, 유독 같이 일하던 상사는 성격이 불같아서 나와 자주 부딪혔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난 그런 상사와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요령이 없었다. IMF 이후 힘들게, 어쩌면 운이 좋게 바로 잡았던 직장이라 그저 견디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스트레스로 인해 어깨와 목은 단단히 뭉쳤고 더부룩한 위장 질환에 종종 시달렸다.


파김치가 되어 지하철을 타고 오는 길에 헛된 다짐만 일백 번을 더 되뇌었다. ‘내가 말이지, 언젠가는 반드시 그 눈앞에 사직서를 던져 놓고 나오리라’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직장인이 그렇듯이, 그 달콤한 말은 매번 공수표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나 그럭저럭 회사 물을 좀 먹은 직장인이 되었다. 이제 제법 회사에 익숙해졌지만, 당시 지방에서 자리 잡은 남편과 결혼하며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다. 항상 ‘던져 놓고 나오리라’라고 상상만 하던 사직서는 공손히 그분 책상에 놓아두었고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길지 않은 회사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퇴사와 함께 자유인으로 돌아오면 단단했던 어깨와 등 근육이 다시 부드럽게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생활 못지않게 두 아들의 육아도 힘들었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어깨와 목을 뭉치게 만들었다. 단단한 등과 어깨는 한 해가 다르게 더해갔고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컴퓨터 타자를 치고 있는 내 목과 어깨 근육은 여전히 뻑뻑하다. 사실 지금도 많은 일에 치여 상체가 뻣뻣해진 것인지,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에 온몸이 뻐근한지 알 수가 없다.


요즘은 조금씩 내 몸의 언어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냥 건강할 줄만 알아서 마음과 몸의 움직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매번 일어나면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기도 했고 말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야 몸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너 지금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니? 언제쯤이면 나도 부드러운 곡선의 등을 가질 수 있을까?”

아, 나도 언젠가는 등 근육과 코어의 힘으로만 바닥에서 올라오고 싶다. 그게 가능하긴 한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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