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가을이 되어 느낀 감정인지, 아니면 인생의 중반의 나이가 된 탓인지는 알 수 없다. 함축적이고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시, 그러면서 잊고 있던 마음을 톡톡 건드려주는 시, 요즘은 그런 글이 읽고 싶다.
사실 시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다. 감수성이 넘쳐흐르던 사춘기 시절에 시 몇 편을 끄적거리다 진작에 집어치웠다. 그 당시 지었던 시들은 마음이 고달픈 사춘기의 치기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반항 심리가 적절히 어우러졌던 그런 글들이었다. 시를 읽어본 친구들은 ‘멋지다’라고 표현해 주었지만 내심 무척 부끄러웠다. 내게 시는 많은 의미를 시어 속에 담고 있으면서 적절한 리듬감과 함께 마지막에는 꼭 ‘아하’라는 울림을 남겨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지었던 모든 시 작품들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글 속에 드러낸 ‘날 것’의 글들이었다. 어디 하나 함축적으로 의미를 돌려 말하지 않고, 비유하지 않고 너무나 솔직하게 쓴 글들이었다. 그래서 시를 멀리했다. 잘 읽지도 않고 잘 쓰지도 않았다. ‘나라는 사람은 태생부터 너무 솔직해서 시와 맞지 않나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 내가 인제 와서 시가 읽고 싶은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은 탓인지, 마음이 헛헛한 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맑은 하늘 아래 시 한 소절 읊조리면 유유히 흐르는 가을 한 조각을 잡고 싶다.
얼마 전 읽었던 <지적 진동> 칼럼에서 최진석 교수는 시와 소설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신의 세계에서 벗어난 문명을 일구며 사는데, 신의 세계에서 벗어날 때 소리를 남겨놓고 빈손으로 와서 문자를 만들었다. 신의 세계에는 춤과 음악만 있고 문자가 없다. 인간 가운데 몇 명은 인간 세계에 적응하는 것보다는 신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일에 더 바쁘다.’
그중 ‘고향이었던 신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강한 사람’이 ‘문자를 최소한 적게 사용하고, 틈새 틈새에 잊지 못하는 고향의 소리’를 짓는 작업이 바로 ‘시(詩)이라는 말이다. 그와 반대로, 인간 세계의 고단함과 복잡함,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업은 아무래도 ’소설‘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보통 삼라만상의 자연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노래한다. 혹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을 향해 따뜻함과 안타까움을 담아 속삭인다. 그 시어 속에는 끝없는 성찰과 더없이 성장하고픈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소설가는 예리하고 냉철하다. 기본적으로 자연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을 비꼬듯이 살펴보며 이야기를 얼기설기 엮어낸다. 그가 만든 이야기 미로 속에 가상의 인물을 툭 던져 넣어 용을 쓰며 벗어내는 모양새를 그린다. 항상 고난 속에서 ’용기와 초심’을 가지고 벗어나면 ’해피엔딩‘이요, 그 미로 속에서 헤매다 운명 앞에 극복하는 이야기는 바로 ’베드엔딩‘이다.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소설들만 찾아 읽었다. 눈앞의 내 삶은 고달프지만, 가상의 세계 속에서 용기를 내며 헤쳐나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너무나 멋있었다. 시는 너무도 먼 이야기요, 소설은 언제나 내 이웃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 역시도 그런 주인공을 꿀 수 있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살아온 순간순간 시가 고플 때도 있었다. 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살아가면 디딜 언덕을 찾아 헤맬 때 항상 시를 읽고 싶었고 또 짓고 싶었다. 요즘 시가 읽고 싶은 것은 나이가 차서 이제는 인간 너머의 세상을 엿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시를 읽으면 내면을 조금씩 채우려 함인지는 알 수 없다.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가을과 함께 이번 가을은 시와 함께 물들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