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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30. 2022

생각의 방향

32, 올해의 남은 숫자이다. 이 숫자들이 지나면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선생은 ‘인간은 지우개 달린 연필’이기에 자신의 삶을 쓰고 지우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올해 어떤 것을 쓰고 어떤 것을 지우고 싶었을까?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해가 있었고, 유달리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려 한 해가 저무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새해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고 어떨 때는 모든 것이 하기 싫어서 오로지 집안 안에서 뒹굴뒹굴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하루가 쌓여서 일주일이 된다. 일주일이 쌓여서 한 달, 두 달, 그렇게 일 년이 되고 수많은 해가 쌓여 인생이 되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지만 마음속으로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의 인생은 항상 넓디넓은 도화지 속의 백지와 같고 아득하기만 하다. 오늘을 조금 빈둥거려도, 그냥 대충 살아도 다음 날이 그것들을 다 보충해 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자꾸만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 나는 2022년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리고 2023년을 어떤 것을 더 진하게 색칠하고 어떤 것을 지우며 살아야 할까?


 올해 마지막 분기 독서토론 수업을 고등학생들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으로서 진행하며 스스로도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무척 뜻깊었다. 아이들도 ‘항상 눈앞의 공부와 시험만 생각했던 일상에서 이어령 선생의 말을 통해 인생과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라는 피드백을 남겨 주었다.


 눈에만 보이는 것에만 함몰되다 보면 가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어버린다. 분명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다른 곳일 텐데 자꾸만 사람들이 몰리는 곳으로 홀린 듯이 따라간다. 그래서 이어령 선생이 젊은이들에게 하는 한 구절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와닿나 보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딱 한 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p.316)


 돌이켜보면 몰아치는 일들이 힘겹고 버겁게 느껴질 때는 내 의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강요로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치 않았던 일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다면 그건 ‘내 커리어’가 될 테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만 간다면 그건 ‘그냥 노동’이 될 것이다. 올해는 다행히 그런 ‘노동’들은 거의 없었다. 좋든 싫든 내 의지와 선택으로 일을 했고, 끝나고 나서 허전함과 동시에 기쁨을 느꼈다. 물론 하고자 했던 수업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들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말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단체는 교육 의뢰가 들어오면 강사들의 정해진 순번대로 돌아가며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구조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들어오는 교육 의뢰와 강사 지명일 경우는 예외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름 보이지 않는 경쟁들이 존재한다. 선생님들이 다들 다른 일로도 충분히 바쁜 분들이라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시기와 질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동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수업할 기회가 자주 없으면 좀 허무감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올해만큼은 그런 마음이 잘 들지 않았다. 항상 텅텅 빈 마음의 곳간으로 연말이 되면 헛헛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는데, 올해는 달랐다.


 사실, 올해 하반기는 과감하게 자기 계발을 위해 들어온 많은 수업을 포기한 해였다. 평소에는 꿈도 못 꿨을 독서교육 과정을 차례대로 들었고, 낭독극도 해 보았다. 시간을 내어 만나고 싶은 친구들과 자주 만났고, 10년째 이어오는 수다 같은 독서 모임에도 주기적으로 참여했다. 8년 넘게 하는 작은 도서관 봉사도 포기하지 않고 하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돈만을 생각했다면 도저히 상상도 못 했을 일들이다. 이런 활동들이 내 마음의 곳간을 조금씩 채워놓은 탓일까? 올해의 겨울은 무척 춥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2022년은 그동안 덮어놓고 다른 사람들의 길을 따라가며 느꼈던 조바심을 조금씩 지우고 가고 싶은 방향을 찾아 나의 길을 조금씩 쓰기 시작한 해였다. 더 이상 남들의 보이는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내 삶의 방향을 찾아보기 시작한 해, 그 시간이 바로 2022년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으로도 삶의 방향에 대한 방황과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겹겠지만, 지금까지처럼 덮어놓고 망각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기억하고 또 고민하며 2023년도 잘 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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