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동안 정들었던 아파트 내의 작은 도서관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다. 얼마 전에 도서관의 부회장님과 회장님께 올해까지 봉사하기로 이미 통보한 상태였다. 횟수로 세워보니 벌써 8년째이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도서관 봉사에 입문했고, 코로나가 오기 이전에는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주 1번 도서관 대출 반납 업무 이외에 아이들의 독서 수업, 논술 수업을 재능 기부하며 몇 년을 보냈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도서관에서는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우리 신랑의 얼굴보다 수업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더 자주 보며 살았다. 특히 큰 애는 작은 도서관과 함께 자란 아이였다.
일하는 틈틈이 매주 도서관 봉사 일을 빼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사히 잘 견뎠다. 그러다 문득 올해 들어 도서관의 봉사가 좀 답답하게 느껴졌다. 다른 외부 일정이 있을 때마다 매번 봉사 일을 바꾸는 것도, 빠졌던 봉사 일을 다시 메꾸기도 쉽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봉사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왠지 서운했다. 지금껏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했지만, 이 일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선생님으로 언제든 교체할 수 있었다. 그런 서운함이 올해까지만 도서관 봉사를 하겠다고 말한 이유다.
그런데도, 도서관 봉사의 마지막 날, 난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이번에 도서관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다른 일정이 있을 때마다 봉사 일을 바꾸느라 전전긍긍할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내년 연말에 또다시 같은 고민을 할 것이고, 온갖 불평불만을 마음속에 담은 채 ‘언제 그만둘까?’라며 기회를 엿볼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또다시 ‘쿨함’과 ‘우유부단’의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고, ‘도서관 봉사를 그만두겠다’라는 결론이 지어진 상태에서 또다시 그 선택을 망설인다. 이 못 말리는 우유부단함이라니…. 지금 느끼는 복잡 미묘한 심리 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무엇이 나를 이토록 고민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 나라는 인간은 익숙한 일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이토록 겁내는 사람이었던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 작가 신동흔은 옛이야기에서 길 떠나는 주인공들의 행동 유형으로 설명한다.
<왜 주인공은 모두 길을 떠날까?>에서 그는 바리데기, 장화와 홍련, 주먹이 등등 옛이야기 속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를 분석했다. 저자는 ‘길을 떠나는 이’와 ‘머무는 이’의 행동을 크게 ‘소설형 인간’과 ‘민담형 인간’으로 나누었다.
‘소설형 인간’은 “사색과 고뇌의 인간형으로 생각이 깊고 아는 것이 많지만 몸이 무거워 잘 움직이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사소한 문제 하나에 부딪혀도 이리저리 고민하고 생각과 고민만 많아 “스스로를 벽에 가두고 갈등하는 사람”이다. 흔히 고뇌하는 햄릿이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에 반해, ‘민담형 인간’은 “생각을 하기 전에 몸부터 움직이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냥 부딪쳐 보는 거지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안 되면 할 수 없고,”라고 시원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주 가볍고 ‘쿨한’ 존재, 이른바 목적이 생기면 그대로 직진할 수 있는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이다. 저자는 길을 나서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소설형 인간’보다는 ‘민담형 인간’이 더 낫다고 자부한다.
나는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 수십, 수백, 수만 가지의 경우의 수를 떠올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는 당연히 ‘소설형 인간’이다. 특히 그 일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이 아닐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며 계속 망설이고만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목적을 정했다면 그대로 돌진할 수 있는 ‘민담형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나 자신은 항상 여러 가지 문제에서 고민만 한가득 짊어지고 다니는 ‘소설형 인간’이라 어떤 것을 선택하기도 결정하기도 너무나 어렵다. 흔히 사람들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나’를 중심에 두고 결정하며 선택이 쉽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모든 문제를 경쾌하게 풀 수 있는 종착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인간관계와 생각들이 엉켜있는 복잡한 경유지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가족들, 복잡한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가 많다. 어떨 때는 지금 우선순위조차 헷갈린다.
어떤 이들은 당연히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1순위’라고 말한다. 가족들을 위해 안락한 가정환경을 준비하고 따뜻한 세끼를 먹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커리어를 채우는 것이 제일 먼저라고 말한다. 인생은 어차피 홀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기에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올해 도서관 봉사를 그만두면서 스스로에게 내세운 변명은 ‘고3인 아들’을 위한다는 이유였다.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도저히 도서관 봉사를 지속할 수 없다는 허접한 이야기…. 하지만 안다. 그것은 초라한 변명일 뿐이다. 책을 좋아하고 조용하고 아늑한 도서관 분위기를 사랑했던 내가 봉사 일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단 하나다. 바쁘고 힘든 일상에도 왜 도서관 봉사를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동력을 이제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스스로 그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잠시의 쉼을 두기로 했다. 그럼에도, 그 마지막 순간을 아쉬워하고 도서관에서 미적거린다. 아마도 아직도 남아있는 도서관에 대한 자그마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쿨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채 말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라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면 계속 나아가기가 어렵다.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분위기, 너무 슬프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