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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Mar 07. 2023

불안할 때마다 떠 오르는 질문, 나는 왜 쓰는가?

 얼마 전 같이 논술 공부를 했던 선생님이 다른 직종으로 취업을 했다며 점심을 샀다. 그 선생님은 예전에 논술 지도자 자격증을 같이 따고 이후 현장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도 ‘이게 내 길이 맞을까?’라며 몇 년 동안 고민을 했다고 했다. 수업 모집에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고, 점점 수업하는 학생 수를 줄이더니, 결국 선생님은 본인이 원하는 길을 찾아 과감하게 직종을 바꿨다.


 이제 보니, 같이 치열하게 논술 자격증 공부를 했던 인원들 중, 본격적으로 제 갈 길을 하는 사람은 남양주에서 논술 학원을 열고 있는 A 선생님뿐이다.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자격증들 중,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자격증이 바로 이 논술 지도자 자격증이다. 그만큼 3명의 선생님과 치열하게 공부했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기에 그 어떤 자격증을 땄을 때보다 뿌듯했다. 그런데, 이렇게 따고 난 후 10년도 안 되어 방구석에 처박아 두는 종잇조각으로 변하다니, 참 서글프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점점 약해질수록 ‘앞으로 뭘 하며 먹고살까?’,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요즘 들어 부쩍 기관이나, 학교에서 “선생님, 이제, 그만 나오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듣는 슬픈 상상도 해 본다. 나이가 한 살씩 먹어가면서 마음이 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든 사람은 ‘스스로 정년의 나이를 정해서 물러나야 한다’라는 강박관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요즘은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나이의 모래시계를 옆에 두고서 앞으로 일할 날들을 가늠하고 있는 듯싶다.


 불확실한 미래 탓인지, 자꾸만 세월을 따라 쪼그라드는 마음 탓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와 같은 유명작가들의 에세이를 종종 들춰보곤 한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어떻게 잠재우며 글을 계속 써 왔는지, 그렇게 끈질기게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 새로운 ‘쓰는 지식’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책의 페이지들을 톺아본다. 하지만, 다들 짐작하겠지만, ‘글을 잘 쓰기 위한, 엄청나게 참신한 비법’ 따위는 없다.


 일단 무라카미 하루키의 조언은 부드럽다. 그는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야쿠르트와의 야구 경기에서 공을 두 손으로 받으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 하루키는 전업 작가도 아니었다. 그는 재즈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간 경기장에서 야구공을 받으면서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주 터무니없는 운명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에세이에서 하루키의 목소리는 자유롭고 유연하고 부드럽다. 책 내용 전체에서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라고 마음을 북돋워 준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일단 쓰기’만 하면 모두가 소설가가 될 수 있는 듯싶다. 물론, 그도 역시 부드러움 속에 날카로운 조언 하나는 숨겨 둔다. ‘글을 지속해서 써내는 것은 상당히 어렵’기에 ‘소설가의 세계’에 들어올 마음이 있다면 단단히 각오하라고 말이다.


 그에 반해, 조지 오웰의 말은 좀 딱딱하고 직선적이다. 대영제국의 경찰 간부로서 식민지 미얀마에서 근무하고, 파리와 런던의 하층 계급을 경험했던 탓인지, 그의 말은 어떨 때는 투박하고 치열하다. 너무나 솔직하게 과거의 경험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아 슬며시 책장을 덮고서 작가의 안위를 걱정하게 만든다. 그는 세상에 대해 직설적이고 정치적이다. 어쩌면 조지 오웰이 <1984>와 <동물농장>과 같은 정치색이 짙은 소설을 펴낸 것에는 그의 강직한 성품이 한몫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은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이라는 4가지 이유를 대며, 쓰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물론 그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다들 짐작하겠지만, ‘정치적 목적’이 가장 클 것이다.


 결국, 세상사가 힘들수록, 쓰는 의지가 꺾일수록 매번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되뇌어 볼 수밖에 없다. 아무알아주지 않아도 말이다. 조지 오웰과 하루키도, 다른 무수한 작가들도 ‘작가가 되고 싶다면 일단 쓰라’고 말한다. 본인이 왜 글 쓰는지에 대한 답을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어떤 이는 현재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글을 쓸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시간에 따라 지워져 가는 본인의 인생에 대해 안타까움으로 컴퓨터 타자를 쳐 내려갈 것이다. 누군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시상을 온종일 고민할지 모른다.


 나는 왜 쓰는가? 잘 모르겠다. 일단 쓰고 싶으니, 쓰고, 불안하니까 더 휘갈긴다. 쓰지 않으면 자꾸만 생각나는 막연한 불안감이 더 두려워 계속 쓸 수밖에 없다. 요사이 펼쳐지는 세상일들이 모두 파란만장한 소설과 같아 복잡하다. 굳건하게 믿어왔던 신념들이 무너지고, 몇 년간 지켜왔던 규칙들이 바뀌고, 사회 분위기가 권력에 따라, 정치인들의 마음에 따라 이리저리 변한다. 각 개인도 스스로도 마음을 붙잡기 위한 불안한 일상의 에세이를 남기고 있는데, 대중 매체에서도 매일 놀라운 내용의 ‘실사판’ 단편소설들이 연재된다. 자꾸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읽고 싶지 않은 장르의 소설들을 몇 권씩 읽고 있자니, 어느덧 뻔한 결말에 익숙해진다. 소시민들은 절대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의 결말들, 역시 정해진 결말들, 아직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최고다.


 늘어나는 나이와 함께 부풀어 오르는 우울한 감정은 사회에서 더 이상 비빌 언덕이 없다는 절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우리 가족을 지키지 않으면, 알아서 본인의 몫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이 자꾸만 글을 쓰게 만든다. 이렇게 쓰고 난 다음에는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까? 마음이 불안한 와중에는 올해의 봄은 또다시 찾아왔다. 춥고 어두운 겨울 뒤에 펼쳐진 따스한 봄이다. 그런 봄의 기운에 빗대어 또다시 희망을 꿈꿔본다. 끈질기게 쓰다 보면, 새롭게 믿다 보면 좋은 일들은 펼쳐질 것이다. 짙은 망각에 내 불안을 맡기고, 이제는 잡히지 않은 무언가를 잡기 위해 그저 믿고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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