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KT 위즈에 패해 2위에 머문 두산의 광고가 화제였다. 두산은 22일 자 종합일간지들에 “KT 위즈의 우승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라는 광고를 낸 것이다. 승부에 지더라도 자존심 때문에 승패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요즘, 상대 팀을 축하하는 보기 드문 패배자의 품격은 놀라웠다.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예약하며 기꺼이 올해의 우승자를 인정했다. 두산이 이렇게 품격 있는 행동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패배를 넘어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요 기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년 역시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참고로 난 젊은 시절 두산 경기가 있을 때마다 찾아갔던 팬이다. 두산에 대한 절대 악감정은 없다.)
요즘 읽고 있는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처음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무엇을 배우려고 한다. 신의 의도든 삶의 의미든 혹은 고통을 다루는 역량이든 뭔가 고통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 끝을 통해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까지는 현재 두산의 행동과 유사하다. 실패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한 걸음 더 나가려는 모습. 사람이기에, 더 발전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이기에 사람들은 더 노력하고 희망찬 미래를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작가는 누구나 기대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고 영원한 고통 앞에서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을 묘사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힘을 내도 끝이 없는 고통이 지속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하면서 말이다.
‘끝날 줄 알았던 고통이 반복되면 고통을 겪는 일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진다. 의미는 끝이 있고 다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끝도 없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득도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생각하고 노력해도 끝이 없다고 절망하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끝이 보이는 결과, 끝이 보이는 승부 앞에선 누구나 무기력해진다. 아무리 생각하고 노력해도 도저히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도전을 멈출 것이다. 난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 드릴 용의가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자식에게도 이 당연한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둘째는 학교 행사에 시큰둥한 모습을 보였다.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보여줄 법도 한데, 이 녀석은 노력하지 않는 것 같다. 결과에 큰 기대를 하는 것도 아니요, 그저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인데 둘째는 그런 엄마의 작은 기대마저 짓밟는다.
가끔 생각한다. 15년의 짧은 세월 속에서 둘째가 깨달았던 인생의 진리는 무엇일지. 그 녀석이 짧다면 짧은 기간, 길다면 긴, 15년 동안 무엇을 느낀 걸까? 매사에 뚱한 중 2 녀석에게 ‘두산의 품격’을 배워 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나의 욕심일까?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내 손으로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 우리는 지금 살아갈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다. 내 소싯적 최애 만화책,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삶은 의미를 가진다’라는 명언처럼. 부디 우리 둘째에게도 그런 엄마의 바람이 마구 쏟아지길 오늘도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