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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날의 풍경

by 하늘진주

오늘도 하루 치의 느낌에 기대어 마음을 정리한다. 특별한 사건, 별다른 마음부침, 며칠째 붙잡고 있는 책조차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날은 하루 글쓰기를 완성하기가 참 난감하다. 임의로 정해둔 글쓰기 마감 시간이 되기 전부터 온종일 마음이 시끄럽다. ‘오늘은 어떤 소재로 글을 써야 할까?’ 머리를 굴리며 주변 사람들의 말, 속을 콱 막히게 했던 여러 사회이슈들을 생각하다 멍하니 해질녘 햇살이 길게 숨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본다. 오늘따라 가을 햇살이 유난히 소담하게 아름답다.


짙은 가을 정경 속에 비치는 사람들은 오늘따라 눈이 부시다. 황금빛 햇살이 반짝여서, 하얀 구름과 어우러진 파란 하늘이 유난히 맑아서, 자꾸만 수많은 생각들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투명한 먼지처럼 흩어진다. 적당한 온도, 상쾌한 바람, 몸도 마음도 자꾸만 느릿한 시간을 따라 걷고 있다.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던 뜨거운 여름을 지나 기어이 걷고 싶은 운치를 만들어 낸 가을의 마법일까? 가을에는 모든 풍경, 스치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 무작정 핸드폰 카메라는 꺼내 사진을 찍으려다 민망한 마음에 속으로만 모든 잔상들을 정리해 둔다. 이렇게 또 10월의 하루가 지나간다.


가을의 평범한 하루는 가끔 추억 속에 저장한 어린 시절의 풍경으로 돌아가게 한다. 시간, 날짜와 같은 구체적인 정보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은 흐릿한 기억의 잔상으로만 남아있는 마음속의 사진 한 컷이다. 오늘처럼 노란 가을 햇살이 가득한 날이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에 기대어 짧은 낮잠을 자다 문득 잠에서 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적적한 늦은 오후, 창문 너머로 길게 뻗어오는 까만 해의 그림자에 놀라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혼자 다른 시간, 다른 세계에 빠진 듯하다. 괜히 “엄마” 큰소리로 외치며 고요한 가을의 침묵을 흩트렸다. 순간 가족 중 누군가 들어오며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이상한 마법은 깨졌다. 어린 시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가을 속의 풍경이다.


어릴 때는 혼자만의 침묵이 무섭고 두려웠다. 방에서 잘 놀고 있다가도 엄마를, 오빠를 자꾸만 불러댔다. “거기 있지?” 나 홀로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일지,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는 알 수 없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항상 바쁘셨고, 어린 시절의 난 딱히 하는 일이 없어 시간이 많았다. 항상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도 집으로 돌아와 만나는 조용한 적막이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항상 오빠 손을 잡고 엄마가 근무하던 근처의 초등학교로 무작정 향했다. 운동장 누런 땅바닥에 기다란 돌로 그림을 그리고 그네도 타다 보면 어느새 태극기가 내려갈 시간이다. “드디어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갈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침묵은 언제나 조용하고 답답한 기다림이었다.


어른이 되어 만나는 침묵은 오히려 축복이다. 지금은 어릴 때처럼 더 이상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이 두렵지 않다. 특별한 외부 일정이 없는 고맙고 소중한 날에 평소에 못 다한 청소를 하고, 다음에 있을 수업 준비를 한다. 그러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글을 끼적이다 보면 하루의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이제 곧 가족들이 올 시간이다. 가족들과 함께 만드는 시끌벅적한 다복한 분위기가 좋지만, 조용히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는 혼자만의 여유가 그립다.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홀로 방에 있어도 자꾸만 그들이 신경 쓰인다. 어릴 때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있는 고요한 분위기가 싫었지만, 지금은 가을 풍경 속에 젖어드는 혼자만의 침묵이 정겹다.


‘명야복야(命也福也)’는 ‘연거푸 생기는 행복’이라는 뜻이다. 특별한 기쁨도, 특별한 슬픔도 없었던 하루, 그래서 2023년 가을의 한 장면으로 어렴풋한 하루의 잔상으로 남을 시간에 이 의미를 되새긴다. 딱 걷기 좋을 만큼 가을바람은 시원했고, 스트레스 받으며 일을 처리할 것이 없었고, 가족들은 아무 일없이 하루 일정을 마쳤다. 때로는 표정으로, 때로는 대화로, 조잘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평범했던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그래, 오늘은 이 마음에서 쉬어가자. 마음의 사진기로 찍고 싶은 평온한 가을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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