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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16. 2023

<<각각의 계절>>(서평)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필요하다’ <<각각의 계절, 2023>>


 소설은 작가들이 거쳐 온 시간의 무게에 따라 다른 맛을 풍긴다. 젊은 신예작가들의 작품에는 요즘의 사회상을 대변하는 독특한 울림이 있다. 그들의 소설은 소재가 기발하고, 문장이 간단명료하며 독자들을 놀라게 하는 반전들이 종종 숨어 있어 재미있다. 반면 문학계에서 잔뼈가 굵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내공이 먼저 느껴진다. 그들의 글에는 묵직한 세월의 아우라가 먼저 보인다. 솔직히 젊은 신인 작가들의 소설들을 읽다가 이런 소설들을 잡으면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렵다.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권여선의 신작소설집 <<각각의 계절>>(2023, 문학동네)이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작가가 숨겨놓은 장치들이 많아 문장 하나, 등장인물들을 계속 되씹어 생각하며 읽어야 했다.


 소설가 권여선을 수식하는 단어는 화려하다. 소설집의 뒤표지의 글을 장식한 권희철 문학평론가는 그녀가 “평범한 언어로는 도무지 포착할 수 없는 일상의 미묘하고도 미세한 영역들을 더듬고 묘사”하며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놓기에 이를 만큼 격렬한 정동이 범람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각각의 계절>>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마냥 단순한 사고의 흐름으로만 읽을 수 없는 글이다. 작가의 유려하고 정제된 문장을 따라 고민하며 읽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탓인지 이 작품집에는 유독 도도한 문학계의 인정을 받은 소설들이 많다. <기억의 왈츠>는 2021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이고, <실버들 천만사>는 2020 김승옥 문학상 우수상을,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2019 김승옥 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각각의 계절>>은 <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기억의 왈츠>의 총 7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일상의 삶에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겪는 차별, 불통, 사랑, 기억의 착각 등을 다루고 있다. 소설집의 제목인 ‘각각의 계절’은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114쪽)라는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소설집의 첫 번째 작품으로, 사람의 관계와 기억에 대한 내용이다. 이 소설은 친구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을 참석한 준희(나)가 친구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대학 신입생 정원, 부영, 경원, 준희(나)는 같은 하숙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일상을 공유하며 지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성향을 지녔지만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정원의 자살과 경애의 배반으로 네 명의 친구 관계는 엉클어지고 만다. 세월이 흐른 후 준희는 어긋난 서로의 관계를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되돌아본다. 이 문답은 대학 시절에 갔던 친구들과 같이 갔던 강촌여행에서 숙소에 들어온 사슴벌레를 보고 말하던 주인의 말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방충망도 있는데 도대체 그렇게 커다란 사슴벌레는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정원의 질문에 주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 더니 이내 득도한 듯 인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로든 들어와. (p.20-21)


 정원과 준희는 상대의 질문을 그대로 받아서 따라 하는 이 대화의 방식을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소소한 유흥으로 시작했던 문답의 놀이는 시간이 흐르며 다른 의미로 변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p.21-22)  

 

 처음에 가볍게 주고받았던 ‘사슴벌레 문답법’은 정원의 꿈과 이상을 대변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몇 년 뒤 정원이 갑작스럽게 자살하자, 준희는 삼십 년 전 정원과 함께 나누었던 사슴벌레 문답에 대해 다른 식의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나는 사슴벌레식 문답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라고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p.28)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p.29)  


 ‘사슴벌레식 문답법’은 소설 속에 총 4번 나온다. 신기하게도 등장인물들의 각각의 상황과 감정에 맞춰 그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이 소설집의 해설집에서 문학평론가 권희철은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는 표준적인 방법”을  “우리와 무척 가까운 특정 세대 공통의 역사 경험을 체험하기”, “우리 자신의 역사적 현실을 돌아보기”. “시간의 원환을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겪기”. “지금 여기 현실을 다시 돌아보기”(p.255)라고 언급했다.


 <<각각의 계절>>에는 자식들이 바라보는 다양한 어머니들의 모습이 있다. <깜박이>에서의 혜진은 본인의 엄마가 “내가 언제 약간 행복해지고 내가 언제 약간 기분 좋아지는지를 딱 노리고 있다가, 딱 재 뿌리는 시점을 엄마는 귀신같이 아는 것 같아.”(p.154)라고 표현한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의 오익은 시시콜콜 전화하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막 해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며 “어머니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원수로 여기는 건 아닌가”(p.198)라고 생각한다. <실버들 천만사>의 채운은 엄마가 “날 사랑하는 거 맞”지만. “사랑해서 힘든 게 보”인다고 말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 나오는 각각의 어머니들을 마냥 모성애가 강한 보편적인 모습으로 그리지 않는다. 때로는 모질고, 때로는 약하고, 때로는 매정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자식들은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각각의 계절>>의 7편의 소설은 각각의 매력이 있다. 작가 권여선은 독자에게 전하는 말에서 “우리가 한 생을 살아나려면 한 힘만 필요한 게 아니라 각각의 시절에 맞는 각각의 힘들, 다양한 여러 힘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4계절의 변화가 자연의 단일한 흐름이지만, 계절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다른 힘이 필요”하고 설명한다. “봄엔 쟁기질하는 힘, 여름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가꾸는 힘, 가을에는 수확하는 힘, 겨울엔 버티는 힘 등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인간의 삶은 단순하다. 태어나 자라고 죽는다. 단일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선택을 한다.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하거나 혹은 혼자 산다. 자식을 낳기도 하고 아니면 자식을 낳지 않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태어나 죽는 인간의 삶은 정해져 있지만 그 속에서 이루지는 인생의 궤적은 같지 않다. 소설가는 이 소설집에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섬세한 기억과 시선으로 보여준다. 좀 묵직하게 인간의 삶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각각의 계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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