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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오픈 북'의 상관관계는?

by 하늘진주

대학시절, 학기 첫 시간에 교수님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의 시험방식을 ‘오픈 북(Open book)’이라고 미리 공지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오픈 북’은 대학 교재나 유의물, 필기 자료, 공책, 참고서 등등을 보면서 치르는 시험 방식이다. 내 경우는 주로 인문 교양과목들을 들을 때 이런 시험을 많이 치렀다. 시험 볼 때 책을 온전히 보면서 자기 의견과 생각만 적으면 된다니, 처음에는 ‘이게 웬 꿀인가’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픈 북’ 시험은 쉽지 않았다. 제한된 시간 안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들춰보면서 마음에 드는 주제, 내용들을 찾기는 무척 어려웠다. 분명 주어진 문제가 있고, 책 속의 내용들이 명확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원하는 구절들만 쏙쏙 뽑아서 내가 펼치려는 주제와 엮어 쓰기가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조급한 마음을 가졌다가는 답안 내용들이 산으로 가기 일쑤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온전히 내 생각에 집중해야 겨우 주제에 맞춰 답안지를 메꿔갈 수 있었다.


요즘 들어 사람의 인생 역시 ‘오픈 북’ 시험이 아닐까 싶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마음만 급했던 30대를 지나 이렇게 40대 끄트머리에 서고 보니 조금씩 주변인들의 삶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인생의 백지장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답을 메우며 가는 사람들이다. 신이 정해둔 인간의 시계는 각각 다른 출발점으로 시작해서 미리 정해둔 종착점을 향해 나아간다. 먼저 일찌감치 삶의 시계를 움직여 이미 80대에 이른 사람들도 있고, 이제야 인생의 시계를 장착한 채 시곗바늘을 돌리기 시작하는 갓난아기들도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다르다. 인간의 사회는 제각각의 시간 속도로 지나는 사람들도 혼잡하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될 때 먼저 이 시절을 지내온 사람들의 행적에서 답을 찾는다. 한때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혹은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와 같이 ‘일등의 삶’이 각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앞서야 성공할 수 있고, 최고가 되어야지만 멋진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일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고, 무슨 일을 하든 월등한 성과가 있어야 가치가 있었다. 성공적이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의 삶을 희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 또 다른 삶의 방식, ‘욜로’가 유행을 끌었다. ‘욜로’는 ‘You Only Live Once (당신의 인생은 한 번뿐이다)’의 줄임말이다. 이 삶은 현재의 삶을 중시하며 지금의 시간을 값지게 보내자는 방식이다. 경쟁만 우선시하는 이전의 삶에 지쳤던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고통스럽게 보내기보다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 인생의 방식에 푹 빠졌고 누구나 ‘욜로’를 외쳤다. 물론 ‘욜로’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흥청망청 돈을 쓰며 과소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보다는 현재의 삶이 소중하다는 의견에는 다들 공감했다. 어차피 사람들의 삶은 무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인생, 성공들을 열심히 곁눈질하며 살았다. ‘남들처럼은 살아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남들처럼’ 공부를 했고, ‘남들처럼’ 일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좋다는 것들이 꼭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각 시기마다 해야만 하는 일들 역시 어떨 때는 정답이었지만, 어떨 때는 오답인 경우도 많았다. 조금씩 다른 사람들의 정답이 어긋날 때마다 ‘너무 늦게 시작해서 그런가’라고 후회한 적도 많았고, 미리 준비하지 못한 어리숙함을 탓하기도 했다. 세상의 답들은 ‘오픈 북’처럼 펼쳐져 있었지만, 그중에서 내가 추구하는 정답을 찾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지금에 와서야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갖는다. 주변을 돌려보니 여전히 돈과 성공으로만 향하는 이들은 지금도 숨 가쁘게 달려가고, 안정과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비우고 있다. 시선을 돌려 이미 인생의 시계를 많이 움직인 이들의 삶을 살펴보니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언제나 열정의 색깔이 달랐던 사람들이 황혼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삶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영원하지 않은 인생, 그 끝자락에서 나는 무슨 말을 남기고 떠나야 할까? 매일매일 그 답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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