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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26. 2023

21세기에 되살아난 사일록의 망령

 <베니스의 상인>의 유대인 상인 샤일록은 ‘돈 대신 살’을 요구한 발언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앤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만약 3달 안에 돈을 갚지 않으면 심장 가까운 곳의 살점 1파운드를 원한다.’라는 차용증을 제시한다. 결국 돈을 갚지 못한 앤토니오는 법정에 서고, 차용증의 내용을 그대로 실행하려는 샤일록이 재판관으로 변장한 포샤에 의해 망신을 당한다는 결말이 <베니스 상인>의 주요 줄거리다. 이 희극에는 극작가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유럽인들이 품었던 유대인에 대한 혐오의 감정들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한마디로 이 극본은 영국인의 입장에서는 희극이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비극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뼛속 어린 적개심과 혐오는 훗날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지게 된다.


 오직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수용소에 갇히고 대량 학살된 이 사건은 20세기에 일어난 최고의 비극이다. 이런 참사는 인간이 지닌 강한 동정심을 자극시켰다. 그런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을 생각하면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의 이미지를 강하게 떠올린다. 종교 때문에 핍박받았던 불쌍한 민족, 나라가 없어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던 국민들이라고 여기며 안타까워한다. 특히 유대인들과 직접 부딪칠 일이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이 훨씬 열광적이다. 우리는 유대인을 생각하면 과거 유럽인들이 그토록 혐오했다는 ‘돈만 밝히는 모습’을 떠올리기보다는 그들이 지닌 ‘우수한 두뇌’를 흠모했다. 아이들에게 유대인 율법학자인 랍비들의 구전과 해설인 담긴 <탈무드>를 읽히고 하브루타 질문을 따라 하며 그들의 뛰어난 성공을 닮기를 희망했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 음악축제 현장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선량한 이스라엘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잡아가는 장면들이 전 세계의 방송으로 퍼졌을 때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응원했다. 그들의 복수는 옳았고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 정상들 역시 하나같이 떠들썩하게 이스라엘을 편들었다. 그런 양상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이 모든 일을 잘 해결하며 잡혀간 인질들을 얼른 되찾기를 바랐다.


 그 후 며칠이 흘렀다. 이제는 반대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로의 국제구호 손길을 막고 매일같이 무시무시하게 폭탄을 퍼붓는다는 말들이 간간히 전해졌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런 무도한 공격은 하마스의 습격보다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잔인성은 서방국가 정상들의 조용한 침묵 속에 감춰졌고 이후 하마스가 몇몇 이스라엘 인질들을 풀어주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이스라엘 이웃국가인 요르단의 왕비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다. 10월 24일(현지시각) 미국 방송 CNN에 출연한 라니아 알 압둘라 왕비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에 의해 민간인들이 사망한 데 대해 서방 지도자들이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는다며 이 일은 "명백한 이중 잣대"라고 비판했다.(출처: 프레시안, 2023,10.25, 이재호 기자)

 

  오늘 날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교전으로 인한 팔레스타인 측 누적 사망자는 5791명이다. 하마스가 납치한 인원이 200명에서 250명이라 추산하면 20배가 넘는 사람들이 18일 동안 가자지구에서 사망했다. 그중에서 어린이들의 사망자는 2360명이고 부상자는 5364명이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은 “날마다 400명의 어린이가 죽거나 다친” 셈이라고 밝혔다. (출처: <경향신문> 2023.10.25, 정원식 기자)


 전쟁이 나면 자기 몸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거나 희생될 수밖에 없다. 서로 교전을 벌여도 민간인들, 특히 노약자들은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규칙이다. 음악축제에서의 하마스 습격이 그토록 전 세계인들의 비난을 받았던 이유는 민간인들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난 현재, 이스라엘은 더 많은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을 죽이며 피의 복수를 하고 있다.


 현재 많은 팔레스타인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손과 다리에 이름을 쓰며 이스라엘 폭격을 견디고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현실, 아이들이 혹시라도 죽게 되면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하마스가 200명의 이스라엘 민간인을 납치하며 심어진 불씨는 가자지구에서 5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들의 죽음으로 활활 타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왜 침묵하고 있을까?


 도저히 차가운 이성으로 풀 수 없는 전쟁의 원리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 세계 각국 정상들의 마음속에는 민족에 따라 이미 목숨 값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몇 명이 죽었든 이권의 논리 앞에서 무시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존엄성도 결국 자본주의 논리 앞에서는 한없이 가볍고 하찮은 것이었다. 본인을 무시한 사람의 살 1파운드를 그토록 원했던 샤일록의 잔인한 망령이 21세기에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이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는 현명한 포샤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의 침묵이 지속될수록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신음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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