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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설거짓거리를 보며 떠오른 단상들

by 하늘진주

하루의 피곤이 무겁게 밀려오는 저녁이다. 부엌에 쌓여있는 설거짓거리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밥그릇 4개, 국그릇 2개, 컵들, 숟가락과 젓가락 등 평소 저녁 설거지 양보다는 훨씬 적다. 마음먹고 10분~15분만 투자하면 금방 해치울 수 있는 양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괜스레 하기가 싫다. 평소 바쁠 때면 남편이나 아들들에게 일을 핑계 삼아 부탁이라도 해 보련만, 오늘은 그조차도 할 수 없다. 남편은 감기 기운으로, 아들은 피곤했는지 일찍 잠들었다. 꼼짝없이 내가 해야 할 판이다.


설거지를 미뤄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한꺼번에 할지 잠시 마음을 먹어본다. 지금의 양이 얼마 안 되니까 아침 설거짓거리랑 같이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다. 귀찮은 일을 먼저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절로 편해진다. 그래, 하기 싫은 설거지보다는 다른 일을 먼저 하는 게 훨씬 좋을 거야. 기쁜 마음으로 저녁 설거지를 외면하고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집안의 물건들을 정리했다가 빨래를 갠다. 그런 뒤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을 집어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부엌에 쌓여있는 설거짓거리들이 못내 신경 쓰인다. 그들이 '이까짓 것 하나 금방 해치우지 않고 뭐 하냐?'라고 소리치는 듯싶다.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하지 않으니, 생각의 나래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간다.


만약 오늘 저녁 설거지를 안 하면 어떻게 되지? 지금 설거지를 안 하면 다음 날 아침 쌓여있는 설거지들 때문에 기분이 나쁠 거야. 아침의 첫 시작이 좋아야 즐거운 하루가 될 텐데 말이야. 그러면 기분이 안 좋아서 누군가와 얼굴이 붉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혹 내일은 엄청 좋은 운이 몰려올 수 있었는데 부엌에 쌓인 설거짓거리로 생긴 불편한 마음으로 도망가는 것 아니야? 절대 안 되지! 당장 게으름과 미룸이 내일의 가치 있는 일을 앗아가는 일은 없어야지.


결국 꾸물거리는 마음을 붙들고 빨간 고무장갑을 깐다. 하기 싫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아주 느릿하게 설거지를 시작한다. 흐느적거리는 분홍색 거미줄 수세미에 투명 세제를 묻히고 하나씩 그릇들과 숟가락들을 정성스레 문지른다. 스테인리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다시 깨끗하게 헹군다. 몇 번의 과정을 반복하고 나니 설거지는 금방 끝났다. 10분도 안 걸린 시간이다. 1시간 내내 하기 싫어 미적거림에 비해 금방 끝났다. 하면 금방 끝날 수 있는 일인데 왜 이리 마음먹기가 힘들까? 항상 마음먹기가 가장 어렵다.


설거지, 청소, 빨래, 밥 하기 등은 일상적으로 매번 반복해야만 하는 활동이다. 때때로 이런 집안일들이 정말 지루하고 너무 귀찮다. 매일 해도 표가 잘 나지 않지만, 잠시 게으름을 피우면 금방 표가 나는 일들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신나는 박수와 함께, “빨래 잘했다.”, “청소 잘했네.”라고 칭찬을 받을 리 만무하다. 너무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어서 때때로 무시당하는 일이다. 그래서 종종 이런 일들을 다른 ‘인정받을 만한 일’들을 핑계 삼아 미루고 싶다.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한다’ 칭찬받고 인정받는 일들에 더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누구나 안다. 이런 당연한 일들을 하지 않으면 불편한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녁 설거짓거리를 미루면 다음 날 아침을 먹을 때 당장 쓸 수 있는 그릇이 없다. 빨래하지 않으면 다음 날 입고 싶은 옷을 못 입는다. 청소하지 않으면 더러운 환경을 감당해야만 한다. 바쁜 아침 시간이 어제의 일을 처리하느라 지체될 수도 있다. 이런 당연한 미룸이 쌓여서 모두가 가치 있는 일들을 시작조차 못 할 수도 있다. 평범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그저 너무 익숙해서 모두가 그 당연함에 빠져 있을 뿐이다. 매일 반복되고 해야 하는 일들은 그만큼 중요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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