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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Dec 02. 2021

아이들이 자신의 우주를 찾기까지 힘이 되어 주기

 요즘 매주 화요일 저녁, 청소년 소설 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 중고등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이들이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하고 언젠가는 아이들을 위한 글 선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으로 신청한 수업이었다. 처음에는 일반 소설과 별 차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주제, 구성, 문체’, ‘인물, 사건, 배경’. 동화보다는 좀 더 복잡하지만, 그 외에는 진행되는 양식은 일반 소설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커다란 인물이 있었다. 그 시기의 아이들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모라는 존재가.


 청소년 소설에는 주로 학교가 배경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친구들, 선생님들이 있고 부모가 존재한다. 아이들이 실생활에서 가장 익숙하게 접하고 만나는 사람들이다. 자기 의견을 활발하게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것만 같은 십 대들은 부모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소설 속에서도 아이들의 생활은 어떤 부모를 만나는 냐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진다. 작품 속에서 공부에 관심이 많은 부모를 가진 설정의 아이는 공부와 학원에서 벗어나고 싶은 꿈 꾸는 십 대로, 술을 좋아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설정의 아이는 험난한 자신의 소우주에서 벗어나 자유를 그리는 청소년으로 주로 그려진다. 나 역시도 그런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설정으로 작품을 썼고, 다른 샘들의 작품 속 주인공 아이들들도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뭐라고 우리 아이들은 내 말, 내 표정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말을 들어줄까? 나는 이 아이들을 향해 몸을 낮추고 귀 기울여 경청한 적이 있던가?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속도에 취해 그저 다그치기만 한 적이 없었던가? 세상이 요구하는 청사진이 내 아이들의 미래인 양 그 조건들을 맞추고자 허덕거린 적은 없었던가?

 십 대 시절의 난 부모님에게 그렇게 이쁜 딸은 아니었던 것 같다. 1등이 최고인 부모님에게 난 항상 1% 부족하고 근성이 없는 아이였다. 매번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오빠에 비해 난 뭔가 모자란 사춘기 소녀였다. 부모가 모든 우주였던 십 대 시절의 나는 뭘 해도 잘 안된다는 자괴감에 항상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쪼그라들었다. 침묵하고, 침묵하고 또 침묵하며 끝없이 나만의 감옥으로 빠져 들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보니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키지 않더라도 나 역시도, 존재만으로 난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오늘도 둘째가 칭얼거린다.

“엄마, 학교 가기 싫어요.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이렇게 심각한데, 왜 꼭 학교를 가야 하나요?” 그러면 난 웃으면서 친절하게 현관문을 열어주 덧붙인다.

 “아들, 오늘도 잘 다녀와.”

 이제 십 대 소녀가 아닌 부모가 된 지금, 엄마로서 아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와 허용 사이에서 고민한다. 내 말이 아이들의 마음을 상처 주지 않도록, 세상의 요구에 아이들이 지치지 않도록, 나태해지지 않도록 오늘도 조심스럽게 마음의 속도를 조절해 본다.

 아이들이 자신의 우주를 찾아서 떠나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3년에서 5년, 이 기간 동안 자신의 미래 우주에서 훨훨 활개 칠 수 있도록 필요한 연료를 마음껏 채웠으면 좋겠다. 변해가는 사회의 속도와 요구에 불안하고 조급함을 느낄지라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편안하고 굳건한 뒷받침이 되어 주자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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