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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Jan 13. 2024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서평)

‘츤데레 번역가의 속사정’


 번역가는 다른 나라 언어 뒤에 숨겨진 작가의 마음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다. 원서에 쓰인 쉼표, 마침표, 따옴표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감정들을 독자들이 이해할 만한 우리말로 옮기며 따라간다. 배우가 작가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연기한다면 번역가는 작가의 생각과 마음으로 차가운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작가의 마음을 누구보다 투명하게 읽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독자들보다 작가의 감정에 함몰되지 않는 냉정한 이성을 지녀야 한다. 항상 원작자의 이름 뒤에 병기되었던 번역가가 본인의 이름을 맨 앞에 둔 에세이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정영목, 문학동네, 2018)을 냈다. 이 책이 어떤 작품보다 반갑게 다가온 이유는 먼저 원서를 읽고 느꼈던 이의 생각이 궁금한 탓이다. 이 작품에는 그동안 번역서의 뒤편에 감춰진 옮긴 이의 속내와 삶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은 크게 ‘내가 통과한 작가들’과 ‘내가 읽은 세상’,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에는 번역한 책들에 관한 솔직한 소회가 담겼다. 저자는 필립 로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랭 드 보통에서 존 밴빌과 이창래까지 그동안 번역했던 작가들 중 12명의 문학 대가를 추려 거장들의 문학세계와 본인의 해석을 들려준다. 정영목 번역가는 1991년에 출판 번역가로 입문했고 현재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많은 작품을 번역했고 많은 번역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번역가인 정영목이 대중들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은 거의 없다. 그런 저자가 원작자의 그늘에 숨겨놓았던 솔직 담백한 속내와 번역한 책들에 대한 의견들, 그리고 번역가의 삶을 이 책에서 발견하는 재미는 무척 쏠쏠하다.


 첫 번째 부분, ‘내가 통과한 작가들’에서는 저자의 뛰어난 문학지식과 글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현학적이고 이성적이고 맛깔스럽다. 그동안 번역한 외국 작가들이 처한 사회적인 배경과 연결해 문학작품들을 가독성 있게 풀어낸다. 그런 저자의 지식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본인이 번역했던 책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다. 거의 30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번역한 인물이라면 번역에 관한 한 자부심을 느낄 만도 한데, 그는 누구보다 조심스럽고 솔직하다. 저자는 본인이 번역한 책들 중 ‘기억에 남는 번역서’이자 ‘애착이 가는 번역서’를 존 밴빌의 <바다>를 꼽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 중 ‘반전을 언급’하는 끝부분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없어 서글펐다고 말한다. 어느 날 번역한 <바다>를 읽고 “이 책만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고 흔들고 또 달래준 책이 없었다.”(p.140)라는 후배를 만나 한편으로 기뻤지만, 본인은 그 느낌을 받지 못해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책의 진짜 힘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p.141) 한 번역이 잘된 번역인지 고민을 한다. 알랭 드 보통의 작품 번역 경험 또한 재미있다. 저자는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을 접하며 작가의 생각이 ‘단순 명쾌’ 하지 않고 사물을 ‘낯설게 연결시키는 사고의 특징’ 때문에 번역이 어려웠다고 토로한다. 그런 면 때문에 “독자는 물론 번역가도 불편하게 한”(p.114) 작가이지만, 그만큼 사랑스러웠다고 고백한다. 누구보다 뛰어난 지식인의 솔직한 고백은 독자들을 끌어 담기는 매력이 있다.


 두 번째 부분, ‘내가 읽은 세상’은 개인 일상에 대한 에세이와 일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비평이다. 그는 담백하고 가독성이 뛰어난 문체와 섬세한 일상의 기록으로 저자에 대한 궁금증을 키운다. 이 저자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도 개인 에세이를 읽으면 이 사람이 번역한 작품들을 궁금해할 것이다. 술술 넘어가는 문장 때문에라도 말이다. 특히 ‘고사장에서’는 문장 첫 부분과 끝부분이 딱 맞아떨어지는 글이다. “종이 울리면 자리에 앉는다”(p.235)로 시작한 문장으로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일어선다.”(p.238)로 끝난다. 저자는 입시 미술을 치르는 아이들의 긴장감과 허탈함을 날카로운 관찰로 표현했다. 그는 아이들이 이렇게 추구하는 ‘창조와 몰입의 다섯 시간’이 “긴 항해에 소중한 구명조끼 노릇”을 해서 “막막한 바다를 떠도는 슬픔이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p.238)라고 묘사했다. 이런 감수성 넘치는 묘사로 그가 얼마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섬세하게 살펴보고 관찰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독자들이 이 작품에 담긴 글들을 전부 흥미롭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혹 시간이 난다면, 이 작품을 읽어보고 본인에게 맞는 비평과 에세이들을 찾아보면 좋을 듯싶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은 번역가가 이야기하는 문학작품들의 비평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그동안 독자들은 그가 번역한 외국 작품을 모국어인 양 자연스럽게 읽었지만, 정작 번역가 정영목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번역가의 숨겨진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고마운 책이다. 저자는 한 마디로 완벽한 번역을 위해 철저히 본인을 숨기는 사람이자 더 성장하고 싶은 번역가이다. 번역가를 꿈꾸거나 외국 문학 이면의 세계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얼른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그런 이후에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이 바로 '번역가의 치열한 사색과 고민'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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