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재의 <방구석 미술관>(2020, 블랙피시)을 또다시 뒤적거렸다. 미술 전공도 아니고 예술과 그림에 조예가 깊지 않지만, 항상 ‘명화’, ‘그림’, ‘그림책’, ‘예술’이라는 제목만 보면 우선 사고 본다. 그렇다 보니, 내 책장에는 이런 부류의 도서들이 꽤 많다. <방구석 미술관>은 예술 분야 최장기간 베스트셀러로, 뭉크를 비롯한 14명의 화가의 사생활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미술 에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거장들의 놀라운 예술혼에 놀라다가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종종 생긴다. 처음 읽을 때는 반 고흐와 고갱의 삶에 눈길이 갔다면, 두 번째 읽어보니 세잔의 일생에 호기심이 인다. 저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화가의 길에 뛰어들었던 20대의 세잔을 ‘맨땅에 헤딩’하는 이라고 평한다.
20대의 세잔은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됩니다. (중략) 세잔이 미술 관련해서 한 것이라고는 고향에 있던 무료 미술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고, (중략) 기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었기에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 입학시험도 탈락합니다.
(중략) 솔직히 20대 때 그의 그림은 어딘가 엉성하고, 우울하고, 명확한 스타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p.224)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미래를 위해 ‘맨땅의 헤딩’하며 달리는 20대 청년 세잔의 모습을 상상하니,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그림책 <샘과 데이브는 땅을 팠어요>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주인공인 샘과 데이브는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을 찾아내야 해. 그게 우리 사명이야.”라고 외치며 땅을 파는 인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아무리 깊게, 오랫동안 땅을 파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궁리 끝에 둘은 방향을 달리해서 땅을 다시 파기 시작한다. 오른쪽을 팠다가, 왼쪽을 팠다가, 위로 갔다가 아래로 갔다가 온종일 땅을 파지만, 헛고생이다. 결국 둘은 주저앉으며 잠이 들고 땅이 무너진다. 결국 샘과 데이브는 아무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뿐이다. 이 결론만 본다면, ‘참 우울한 내용이다’ 싶은 그림책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는 뜻밖의 반전들이 많이 숨어 있다.
첫째, 샘과 데이브가 땅 파는 곳곳에는 수없이 많은 보물이 숨어 있었다. 그들이 한 치만 더 앞으로 삽을 휘둘렀다면, 굵직굵직하고 커다란 보물들을 수없이 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샘과 데이브는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다른 방향으로 가 볼까?”라며 방향을 돌린다. 그런 주인공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신음만 날 뿐이다.
둘째, 샘과 데이브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우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땅에 떨어진 후 둘은 “어마어마하게 멋졌어.”라고 동시에 외친다. 그들 손에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없지만, 표정이 밝다. 인물들의 그런 심경을 묘사하듯, 작가는 그림책의 앞장과 뒷장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그림들을 숨겨놓았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아심만 가득 품을만한 그림책이다.
땅속에는 반짝이고 커다란 보물들이 가득 숨겨져 있지만, 샘과 데이브는 도통 발견할 줄 모르고 지나친다. 주인공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거에 수없이 놓쳤던 ‘대박 기회’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들만 잘 잡았다면 ‘멋진 집’, ‘많은 돈’, 유유자적 여행을 즐기고 아무 걱정 없는 유한마담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존재했던 수많은 보석들을 캐지 못했더라도, 지금의 삶에는 후회가 없다. 소소하지만, 나만의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들을 발견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방구석 미술관>의 저자는 매번 “평단과 대중에게 비웃음과 욕만 얻어먹던” 세잔이 끝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작업을 할 때 느끼는 ‘정신적인 만족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세운 뜻을 식지 않은 열정과 각고의 노력으로 이뤘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신적 만족’이라고 설명한다. “고민, 시도, 좌절 그 무한한 반복 끝에 발견한 티끌만 한 빛 하나에도 차오르는” 감정이 바로 이 ‘만족감’인 셈이다. 이런 뿌듯함으로 ‘맨땅에 헤딩’하며 땅만 줄곧 파던 세잔이 본인만의 보석을 발견해 거장의 이름을 단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어쩌면 그림책 속의 샘과 데이브도 언젠가는 자신들이 원하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는 캐지 않은 수많은 보석이 숨어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발견하고 캘지는 본인의 몫이다. 예전에는 다른 이들이 감탄할 만한 보석 더미를 캐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움츠러드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다른 이들의 기준과 내 기준은 다를 테니까 말이다. 유명한 에세이의 제목처럼,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자세가 어쩌면 요즘은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