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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Dec 15. 2021

청소년 소설 창작 속 나의 맹렬함 일깨우기

 어제 ‘청소년 창작 소설 수업’을 땡땡이쳤다. 오전만 해도 문우들의 합평작을 뽑고 시간 틈틈이 글들을 읽으며 합평 준비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날 하루는 이상하게 모든 일에 의욕이 없는 날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여느 때와 별다를 게 없는 날이었지만 모든 일이 귀찮게만 느껴졌다. 결국 창작과 다른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클릭’ 한 번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온라인 수업을 다른 일정 때문에 ‘못’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 들어간 것이다. 또다시 내 안의 맹렬함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는 신호다.


 겉으로는 항상 수업을 잘 참여고 숙제를 꼬박꼬박 해 갈 것 같은 내 이면에는 ‘게으르고 모든 일에 시큰둥한 사자’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가끔 매사에 준비가 철저한 남편은 항상 자유분방하고 모든 일을 닥쳐서 하는 둘째를 볼 때면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왔을까?’ 궁금해한다. 그럴 때마다 ‘아들이 아빠 닮지, 누구 닮냐’고 큰소리를 치지만 나는 안다. 저 녀석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자유분방한 DNA는 아마 나에게서 왔을 거라고. 물론, 이건 아이들이 독립할 때까지 대외적인 비밀이다. 항상 그랬다. 내 일의 모든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흐지부지되는 게 생활이었다. 쇠심줄 같은 끈기와 지속적인 열정이 없어 그때그때 바뀌는 상황과 대하는 사람들에 따라 슬럼프를 겪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새롭게 마음을 채우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의지로 꿈을 꾸고 있는 나 자신이 참 신기하다.


 힘차게 시작했던 ‘청소년 소설 창작 수업’이 좀 시들하게 느껴지기 진 계기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쓰고 읽던 소설 속 인물들이 일정한 생활 방식과 빈곤한 상상력의 수레바퀴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발견한 순간부터 재미없게 느껴졌다. 왜 청소년 소설은 하나같이 부모와 친구와의 갈등, 학교 폭력, 시험 등만 다루는 걸까? 물론 ‘완득이’나 ‘아몬드’와 같은 특이하고 참신한 주제와 소재를 다룬 소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청소년 소설 속 아이들의 생활과 생각은 학교와 가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소재와 주제로 청소년 소설을 쓰면 좋겠지만 나 역시도 요즘 청소년들을 생각할 때 어떤 소재와 주제로 써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학교, 시험, 친구, 학교 폭력, 성적, 가출, 사춘기, 성장…. 이 외에 어떤 이미지와 생각들로 써야 할까? 사람들의 삶과 인생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극적으로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 그 평범한 인생과 삶에 양념을 치고 극적인 주인공을 만드는 것이 바로 소설가의 몫이다. 나를 고민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이 역량 부족일 것이다.


 큰 애를 낳기 전만 해도 아이 출산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소설가들이 묘사한 것처럼 처음 출산하여 아이를 품에 안으면 사방에서 오색구름과 함께 빛이 쏟아지는 줄 알았다. 그러면 엄마는 귀엽게 입을 오물거리는 뽀얀 아이의 피부를 사랑스럽게 한번 쓰다듬고, 땀에 젖은 숭고한 얼굴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난 생리통보다 몇 배나 심한 고통 속에서 큰 애를 출산했고 이후에는 온몸이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같이 출산의 전투를 함께 한 의사는 한 아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윗배에 쓱 올려 두었다. 울긋불긋, 시끄럽게 울고 있는 웬 원숭이처럼 생긴 아이. 저 녀석이 10달 동안 내 배에 있다 나왔다고?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아 마냥 쳐다보기만 했다. 신기함, 이상함, 걱정스러움. 온갖 감정들이 내 속에서 휘몰아쳤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는 모성애는 처음부터 내 속에서 우러나지 않았고, 기르 키우면서 밤을 새우고 같이 울면서 조금씩 채워졌다. 소설가들은 처음부터 위대한 모정이 생겨난다고 표현하더니만 내가 읽은 책들은 다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요즘 청소년 소설에 대한 내 맹렬함을 다 갉아먹는 결정적인 원인은 어떤 것을 써야 좋을지 모르는 빈약한 내 상상력과 특이한 소재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무서워하는 나의 조심성 때문이다. 무엇을 써야 하지? 아침에도 마지막 시험을 치러 나가는 둘째를 붙들고 물었다.

“아들아, 요즘 무슨 생각을 하니?”

“아무 생각이 없는데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도 없니?”

“없어요!”

 요즘 청소년인 아들도 아무 생각 없고 청소년 소설을 쓰고 싶은 나도 아무 생각이 없고.

그냥 ‘아무 소설’이나 쓰면 되는 걸까?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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