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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팥죽을 생각하며

by 하늘진주

어제는 12월 22일, 동지였다. 2020년의 동지는 ‘애기 동지’라 팥죽 대신에 팥떡을 먹는 날이었다. 그래서 작년 이맘때 저녁에 떡집을 들러 떡을 사려다 모두 동이 나서 결국 먹지 못한 기억이 있다. 올해 동지는 팥죽을 먹는 ‘중 동지’였다. 미리 팥을 불려 준비할 자신은 없어 일찌감치 유명한 브랜드 죽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려도 죽집에서는 몇 분 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연결된 전화, 팥죽 준비는 가능한데 주문이 많이 밀려 2시간 반 뒤에 찾으러 오라는 이야기였다. 그 짧은 통화 순간에도 죽집 전화는 쉴 새 없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2021년 동짓날 풍경이었다. 보통 10분이면 죽을 먹을 수 있던 죽집에서 2시간 반이 걸릴 정도로 주문이 밀려들고, 사람들은 전화와 발품을 팔아 여기저기 팥죽을 찾아 돌아다녔다. 후손들은 조상님들이 정해놓은 전통을 충실히 따르며 그렇게 올해 동지를 보내고 있었다.


동지의 팥죽을 생각하면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생각난다. 그 당신 부모님은 항상 맞벌이로 바쁘셨기에 외할머니께서 오셔서 우리 형제들을 돌봐주었다. 밤이 제일 긴 동지가 되면 곱게 팥을 가득 쑤어 놓고 팥죽 한 그릇을 떠 두셨다. 그리고 마당 밖과 대문 밖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면서 팥죽을 흩뿌리셨다.

“할머니, 왜 자꾸 팥죽을 버려요?”

“우리 집에 악귀가 들어오지 말라고. 이렇게 팥죽을 뿌려두면 악귀가 안 들어온단다.”

어린 마음에 아까운 팥죽을 자꾸 버리는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매년 하루, 이렇게 할머니께서 쑤어주시는 팥죽은 너무 달콤하고 맛있었다.


그렇게 팥죽을 좋아하던 어린 소녀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세상에는 바쁜 일 천지였다. 대학 시절에는 친구들과 대학의 낭만을 나누고 또 한편으로는 취업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취업한 이후에는 매일매일 일의 연속이었다. 조상님들이 점지해준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상사의 질책을 피하고자 여기저기 몸을 사리던 나날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팥죽을 준비하고 같이 무사 무탈을 기원하기보다는 내 한 몸 가누고 버티기도 힘들었다.


‘동짓날’ 팥죽을 준비하고 ‘정월 대보름’에 부럼 거리를 사놓고 전통을 따르며 구색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결혼한 이후부터였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나’만 알던 소녀는 ‘우리’를 생각하는 엄마가 되었다.

어릴 때 세모나게 수박을 잘라두면 가운데 수박만 쏙쏙 빼먹어 매번 친정 오빠에게 통박을 듣고 했다. 오빠는 항상 ‘너만 입이냐?’라며 순서대로 먹으라고 짜증을 냈다. 잘라둔 수박을 순서대로 먹으면 매번 하얀 부분이 두툼하게 있는 가장 맛없는 부분을 먼저 먹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매번 수박 먹는 순서를 양보하느라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친정어머니는 몇 번째 수박을 드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얀 부분이 많은 첫 번째 부분을 드셨는지, 아니면 빨갛게 잘 익은 달콤한 가운데 부분을 드셨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수박의 빨갛게 잘 익은 부분을 먹던, 하얗게 설익은 부분을 먹던, 모든 부분을 잘 먹을 수 있는 ‘엄마’가 되었지만, 예전과는 다른 이유로 가운데 수박에 손을 잘 대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은 내가 어떤 부분을 먹든지 상관하지 않겠지만, 아이들이 오물오물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른 입장이 되었다. 예전에는 ‘너희가 잘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라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끔은 그 말이 진실이 될 때있다. 엄마가 되면 진짜 그룹 GOD가 불렀던 노랫가사처럼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가 가능한가 보다. 물론, 사실 아직까지는 자장면이 더 좋지만 말이다.


친정 부모님은 가끔 나를 보며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에서 어른이 됐다고 신기해하신다. 나이가 점점 들수록 책임질 일이 많아진다. 어릴 때는 나 몰라라 했던 일들이 지금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로 자꾸만 밀려온다. 조상들이 정해놓은 전통들을 나름 시늉하며 따르려고 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고 설날에는 떡국을 먹고 정월 대보름에는 부럼을 깬다.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밖에 모르는 녀석’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예전에 사춘기 시절 내가 매일 들었던 말들을 내뱉는다. 저 녀석들도 언젠가는 가족들을 위해 팥죽을 준비하고 부럼을 깨는 일들을 반복하겠지? 이것들아, 얼른 어른이 되거라. 엄마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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