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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네스장 Apr 09. 2021

할머니의 공간을 기억해봅니다.

추억을 꺼내봅니다.  

서울 한복판, 청계천변에 있었던 외할머니댁은 중앙에 작은 마당이 있고 계량화된 한옥 같은 'ㄷ'자 형태의 주택이었다. 거실 천정의 서까래며 바닥의 원목 마루며, 주방 아궁이에 불을 때면 방바닥이 활활 타오를 정도로 뜨거워지는 한옥의 온돌 구조가 적용된 집이었다. 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설 때는 미닫이 문이 스르륵 열리는 법이 없어서 위아래로 삐그덕 거리며 밀어 열어야 했다. 잠금장치도 없는 나무 문짝이 사랑채 같은 공간을 쓰는 할머니와 나머지 방에 세 들어 사셨던 분들과의 유일한 구획이었다.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하셨기 때문에 메인 주방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못하시고, 거실의 일부를 주방으로 개조해서 쓰셨다. 마룻바닥으로 된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한지로 발려진 미닫이 문이 있었다. 한지는 문을 열고 닫으면서 자꾸 손가락이 끼어 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구멍이 크게 벌어지면 할머니는 한지를 잘라 덧 데는 보수를 하셨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면, 그 공간이 할머니가 주무시고 TV도 보시고 생활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한쪽에는 옷장이, 전면에는 TV가 다른 한쪽에는 벽 안으로 수납공간이 아예 갖춰져 있는 지금으로 따지면 붙박이장이지만 가구가 아닌 벽체에 문이 달린 구조로 된 벽장이 있었다. 앞에 할머니가 주무시는 보료가 항상 깔려 있었다. 불을 때면 보료 밑은 절절 끌었다. 나와 엄마 아빠는 방에 들어서면 바로 그 보료 밑에 발을 넣고 누워서 온몸을 지지다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하셨지만 그 집에서 혼자서 살림을 사셨다. 할머니 댁 마당에는 덩굴 형태로 자라는 박도 있었고, 화분 형태이긴 했지만 봉숭아 꽃도 있었다. 여름밤이면 연례행사처럼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셨다. 할머니 댁에서 들인 봉숭아 물은 항상 예쁜 색으로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어릴 적에 할머니 댁에서 자는 것을 참 좋아했다. 할머니 댁에 가면 항아리 바나나 우유를 먹을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종이 인형도 사주셨고, 탕수육도 시켜 주셨었다. 내가 가면 할머니는 바나나 우유를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 전화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장난감도 꼭 한개씩 얻었다. 장난감 가게는 할머니 댁에서 큰길을 건너 꽤 걸어가야 했었는데  어떻게 장난감을 샀었는지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누군가 같이 가주셨던 것 같은데, 할머니가 직접 가시진 못했을 터이다. 내가 갈 때마다 사서 모았던 종이인형 박스가 있었고, 나는 갖가지 인형의 옷을 갈아 입히며 혼자 잘 놀았다. 할머니와 나는 화투 짝 맞추기를 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할머니는 김치도 맛갈지게 담그셨었는데, 생태를 넣어 삭힌 할머니 김치는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도대체 그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김치를 담그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 싶다. 어릴 적 기억에는 할머니가 김치를 장독에 넣는 장면만 있다. 그 과정은 내겐 관심 밖이었겠지 싶다.


다리가 아프셨는데, 온돌에 불은 어떻게 넣으셨지? 또 의문이 든다. 도대체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혼자서 어떻게 하고 사셨을까?


할머니 댁 다락은 무언가 신기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차마 무서워서 직접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꽁꽁 숨겨놓은 다락인 듯했다. 가끔 할머니는 다락에서 맛있는 간식거리를 꺼내 오시곤 했다.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월병도 그곳에서 꺼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기가 통하는 이 다락이 서늘하여 보관하기 좋았을 것 같다.

다락과 연결되는 벽속의 공간

할머니 댁은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우리 집 근처로 이주를 오셨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막 이주한 이후의 할머니 댁에 갔었다. 할머니 댁 곳곳을 사진 찍어 두었었는데…. 할머니 댁 앞에 있던 작은 가게에서 포도 봉봉을 사 마시며 친구들과 허물어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였었다. 그 당시에 디자인계에서는 사라져 가는 노스탤지어에 대한 콘셉트가 화두였던 것 같다. 전통고가옥은 아니었지만 현대화된 한옥이 재개발로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황이었었다. 전통 고가옥이야 잘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옥과 양옥의 중간 즈음되는 양식의 주택으로 이렇게 과도기 적인 집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 기억이 육이오 사변과 일제강점기를 겪으신 우리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철거 전 마당에 놓인 물건에서 그 시절을 느끼다

할머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시고 쾌적한 환경에 마음에 들어하셨던 것 같다. 가까워서 자주 왕래할 수 있었고, 할머니 신부름으로 빵을 사다 드리거나 통장 정리를 해다드 리기도 했다. 가끔 집에 바로 가고 싶지 않을 때에는 할머니 댁에 들러 TV를 보다 가기도 했다. 왜 그때는 할머니의 말을 더 귀 기울여 들어드리지 못했을까? 나는 직장 초년생으로 바빴고, 할머니를 돌봐드려야 한다는 배려도 부족했다. 그나마 할머니를 설득해서 전동 휠체어를 마련해드리고, 작동법도 알려드리고, 혼자서도 가벼운 산책을 하실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었고, 또 할머니도 좋아했던 기억이 아득하다.

 

처마에 덧데어 연결 확장된 지붕, 비가 오면 소리가 요란했다.

얼마 전 한옥에서 시간을 보낸 계기로 할머니와 할머니가 계시던 공간을 더 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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