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쌓는 추억

걷고 또 걷기

by 아네스장

유독 걷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디를 가던 만보 이상은 걷게 된다. 신혼초에는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이 달라 다툼도 많았다. 외출할 때면 무조건적으로 차를 타고 나가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나와 달리, 남편은 주차가 무료인지, 차가 밀리는지,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와의 시간과 비용을 비교해서 가성비가 좋은 방법으로 결정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가 주장해서 차를 가지고 나갔다가 밀리기라도 하면 남편의 짜증은 내 차지가 되어야 했던 것처럼, 서로가 살아왔던 생활패턴을 이해하고 적응하기까지 꽤 시일이 걸렸다.

일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온 이후, 나도 차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더 우선시하게 되었다. 주차도 힘들고 주말에는 차가 많이 밀리는 서울에서는 대중교통이 심적으로도 편하고, 이동도 자유롭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외출을 하는 날이면 매번 녹초가 돼서 돌아오곤 하였다. 키가 커서 걸음 폭이 큰 데다 걸음도 빠른 남편을 쫒아 걸어 다니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를 데리고 걸어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즈음부터는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이 늘었다. 아이와 동행을 해도 남편의 걷기 속도는 여전히 빨랐고, 남편을 따라가느라 힘들다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것은 내 차지였다. 아이에게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등 간식을 하나 쥐어줘야 목적지까지 간신히 갈 수 있었다. 우리의 나들이는 주로 서울 구경하는 관광객처럼 하염없이 걸으며 주변을 구경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남편이 검증해둔 식당이나 새롭게 가보고 싶었던 곳까지 또 걸어서 찾아가곤 했다.

주된 걷기 코스는 광화문 주변이나 압구정 주변이었는데, 광화문 코스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작해서 경복궁까지 걸어가서 청와대 앞을 지나 삼청동까지 가기도 하고, 광화문에서 시청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시립미술관, 정동 아트홀 등을 거쳐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오는 길 등 다양한 루트가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이 지역의 봄, 가을은 관광객과 나들이객으로 항상 활기차고 종종 거리 행사도 많았기에 즐겨 찾는 코스였고, 교보문고나 맛집 등 들를 곳도 많고 비싸지 않고 맛있는 식당도 있어서 가성비가 꽤 좋은 코스였다. 그런데 매번 나들이마다 정말 많이 걸어야 하는 코스였다.

압구정 주변 나들이는 그나마 수월한 편인데, 한때 차를 너무 좋아하던 아이의 최애 외출 코스로 자동차 매장들이 즐비한 일대를 걸어 다니며 매장마다 들어가서 차를 구경하고 커피나 음료를 얻어 마시기도 하고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료로 폴 바셋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현대 모터 스튜디오는 꼭 들리는 스폿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점심을 먹은 후에 들리기 좋았다. 아이에게 차 구경을 시켜주고 남편과 나는 부담 없이 후식으로 커피를 마실수 있어서였다.


많이 걷는 남자랑 산지도 15년이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웬만한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날이 따뜻하여 걷기 좋았던 어느 날은 따져보니 만육천보 이상을 걸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목에 있는 공원을 산책한 후 식당으로 걸어가고, 식사 후엔 소화도 시킬 겸 집까지 걸어온 것이 약 6 천보였다. 오후에 살 것이 있어서 집에서 멀지 않은 백화점을 다녀왔는데, 왕복하니 만보였다. 날씨만 받쳐준다면 걷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전에 같으면 남편이 한참 앞서갔을 텐데 그날은 내가 바짝 붙어서 걸어오니,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잘 쫒아 오는데!' 라며 몇 번이나 놀림반, 칭찬반으로 얘기한다.

일상 속에서 웬만하면 걸어 다니고, 나들이로 걷기 좋은 동네를 찾아가서 걷고 구경하고 커피 한잔으로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또 걷고, 그렇게 우리는 걷고 또 걷는다. 남편을 따라 걷는 것에 이력이 난 아이도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 걷는 게 빠르다며, 걸어올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아이 이게도 좋은 습관을 만들어 준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걸어 다니기 시작한 것은, 돈을 적게 들이는 나들이 방법 중 하나로 택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쓰고 보니 관광객이 되어 여행하는 기분을 낼 수 있었던 우리의 알뜰하고도 하염없는 걷기가 새삼 의미 있는 추억이 된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020년 마지막일지 모를 부부 라이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