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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의 차이

2019년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판 여성의 창 마지막 기고글

나는 혈액형이 A형이다. 그래서인지 한없이 소심하다.

겉보기에는 대범한 사람 같다는데 속으로는 소심하고, 좁기가 밴댕이 소갈머리 같다.

작은 일에도 상처 받고 아무도 모르게 토라지기도 매우 잘한다.

이런 내게 하느님께서는 섭섭하게 한 사람의 이름과 내용을 적으라고 내 머리 안에 빨간 볼펜 한 자루와 두툼한 수첩 한 권을 주셨다.

빨간색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깨알 같은 글씨로 나는 많은 이들의 이름을 적는다.

큰아이가 내 말을 안 들어 속상했다, 남편이 오늘 작은 일로 내게 짜증을 냈다, 아니면 누가 내게 섭섭한 말을 했다 등등등, 소심한 내가 유치하기가 그지없는 내용들을 수첩에 가득 적는다.

그런데 하느님이 수첩 말고 내게 주신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물고기보다도 못한 기억력이다.

하루 종일 가득 적어둔 수첩을 자는 동안에 몽땅 잃어버리게 만드신다.

그래서 종일 머릿속에서 가득 채워두었던 수첩 대신 매일 아침 깨끗한 새 수첩을 주신다.

어제 일은 다 잊어버린 채 새로 받은 수첩에 또 하루 내내 열심히 이름들을 적어대며 삐진 속을 푼다.


소심한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이렇게 만들어 주신다.

늘 많은 것들을 기도하고 간구하지만 하느님은 내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분이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 툴툴 대며 살아가긴 하나 그분은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이기에 나는 끊임없이 원하는 것을 청한다.

늘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기도하고 또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바라지만 챗바퀴처럼 반복되는 날들을 살고 있다.

그런데 조금만 움직여 그 안에서 내 시선의 방향을 한 걸음만 옆으로 또는 한 걸음만 뒤로 옮겨보면 다른 것들이 보인다. 옆지기의 굽어진 어깨도 보이고 또 아이의 무거운 가방도 보인다. 다른 날을 살기를 바라는 나를 하느님은 한 걸음 움직이게 하신다.

그래서 같지만, 다른 날들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엘리자베스 호숫가에 유채꽃이 가득하다.

호수의 북쪽 부분에 열 걸음 정도 걷는 거리로 유채꽃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한 걸음만 더 벗어나도 향기는 사라진다.

한 걸음의 차이, 시선이나 향기 나 한 걸음으로 달라진다.

그 작은 한 걸음의 차이로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나를 겸허하게 만드는 소박한 신의 섭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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