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못해 감사한 것들
지난 6월 초, 남편과 함께 아침 일찍 종합검진을 하고 왔다.
그날따라 검진을 받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구석구석 에어컨이 가동되는 병원에서 얇은 검진복만 입고 맨발로 5시간 반을 버텼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식사를 하자마자 기진맥진, 평소 낮잠은커녕 밤잠도 잘 못 자는데 기절하듯 쓰러져 몇 시간을 잤다.
다 늦은 저녁에 일어나니 몸이 찌뿌드드, 입안도 깔깔했다. 낮부터 얼어있던 팔다리가 시렸다.
검진 후에 받은 카스텔라를 저녁 대신 먹었다. 몸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차 한 잔을 우려 마시며 하루를 돌아보았다.
낮에 병원 로비에 앉아 낯선 사람들 사이 검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몸에 스며드는 익숙한 한기에 몸을 움츠린 채 예전에 입원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직원이 아닌 환자 입장에서 마주하는 병원은 늘 어딘가 썰렁했다.
늦은 밤. 통증으로 잠 못 자던 시간들.
환자복 하나로 통일된 사람들 사이 조용하고 어둡던 복도와, 음료자판기의 기계음만 울리던 새벽의 병동 휴게실. 옆자리 환자의 작은 신음소리. 간신히 든 잠을 깨우던 간호사의 새벽회진.
과거를 떠올리는 사이 평소라면 두 시간 반정도면 끝났을 검사가 사람들 속에 부대끼며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날이다. 좀 늦어지면 어때,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변줄을 끼고 수액 주렁주렁 달고 병실에 누운 게 아니어서 감사한 것은 그 생경하고 불편한 감각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랜 투병]
이 말 안에 얼마나 많은 불편함과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 숨어 있는지를 어느새 까맣게 잊고 살고 있었다.
검사 전 문진표를 작성하면서 과거 수술력 두 개를 빠뜨린 것도 집에 오며 뒤늦게 떠올렸다. 오래 투병하고 다양하게 아팠었다. 그만큼 관련된 기억들이 많지만 이젠 수술부위가 좌우 어느 쪽인지 몇 번이나 수술했는지도 희미하다. 이렇게 일어나 움직이고 일반식을 할 수 있는 오늘의 삶이 늘 새롭고 특별하다. 일상의 감사가 얼마나 묵직한 가치인지를, 낯설어진 병원 풍경이 다시 돌아보게 해 주었다.
사실 정신건강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축복이다.
독일 심리학자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의 망각곡선 개념이 생각난다. 인간의 기억은 하루만 지나도 70%가 사라진다고 한다. 우리는 알고 있거나 새로 배운 많은 것을 놓친다는 뜻이다. 학습에는 방해가 되는 요소이지만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내는 데 꼭 필요한 성향이 아닐까. 좋은 일은 기억할수록 힘이 되지만, 힘들고 아픈 일을 하나도 잊지 못한다면 인생이 매일 칼날이요 채찍이 될 것 같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일상의 습관으로 만들면 힘든 기억은 자연히 점점 더 멀리 떠밀려갈 것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었던가.
좋지 못한 기억들은 별 일 없이 무사한 오늘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 가치를 느낄 대조군이 될 정도로만 남겨도 충분하다. 감사한 일은 기록해서 오래 기억하고, 나쁜 일은 글로 정리해 보되 차곡차곡 접어서 망각의 시간으로 분류해 떠나보내자.
망각은 때로는 슬픔이지만, 많은 경우 또 다른 추억을 채울 힘을 가져다주는 감사한 선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