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벽이 깨지던 날
오래전, 대학 1학년 때. 학과 선배의 권유로 들어간 동아리는 격주로 한 보육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초·중·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야학선생님이자 언니오빠가 되어주는 일. 나에게는 첫 자원봉사 경험이었다.
내가 방학마다 개인 지도를 했던 중학생 S는 말수가 적고,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우리의 대화는 늘 어딘가 겉돌았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답이었고 그나마 자주 고개를 숙인 채였다. 친밀감은 쉽게 생기지 않았지만 빠지지 않고 2주마다 만났다. 밥도 함께 먹고 부족한 학업을 지도하며 시간을 쌓아갔다.
3년이 흐른 어느 여름, S가 불쑥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은 뭐가 그렇게 항상 즐겁고 행복하세요? 항상 웃고 계시잖아요.
난 웃고 싶을 때가 별로 없는데요.”
사실 S의 짐작과 달리 당시 우리 집은 대학생이 넷이나 되고 아버지의 사업이 가장 어려웠던 때였다. S는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에 다니고 늘 웃는다는 이유로 나를 부잣집 딸이라 여긴 것이다. 그동안 S에게서 느껴진 묘한 거리감은 부러움과 위화감의 다른 표현이었다.
S는 내가 자원봉사를 통해 처음 인연을 맺은 아이였다. 돕는 입장이니 나의 힘든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름의 배려라 여겼는데 오히려 오해를 낳았다. 그 시절 나는 어쩌면 자원봉사 자체를 기쁨으로 여겼던 것 같다. 우리들의 진심이 서로에게 열리기까지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진로 고민이 가득하던 스물한 살의 나도 어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S는 나와 같은 자원봉사자를 이전에도 겪었을지도 모르겠다. 속을 알 수 없는 자원봉사선생님에게 S가 거리감을 느낀 것이 당연했다.
그동안 느낀 벽을 해결할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어떤 형태의 관계이든 서로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할 때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 누군가의 진심에 다가가려면 때로는 내 마음을 먼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S의 솔직한 고백 덕분에 우리는 진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날이 내가 진정한 자원봉사자가 된 첫날이었다.
2년 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자 대학원생이 되었다. 자원봉사활동이 후배들의 몫이 될 무렵 보육원은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오랜만에 찾아갔을 때 S는 고민 많은 고등학생 큰언니였다. 당시 보육원이 이사한 곳은 배밭을 끼고 있었는데, 바로 옆이 화학공장이었다. 시들한 배가 자라는 배밭 옆이라 동생들 얼굴도 노래지는 것 같다고 걱정하던 S의 모습이 어른스러웠다. 환경오염의 피해가 아이들에게 갈까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는 보육원에 갈 기회가 없었고 S를 다시 보지 못했다.
미숙하고 답답한 자원봉사자에게 솔직하게 먼저 다가와 마음을 흔들었던 S였다. 내성적이고 마음이 여렸던 내가 마음의 경계를 넘어, 벽을 무너뜨리고 소통하는 법을 배웠던 그날의 대화를 잊지 못한다. 그 경험은 훗날 사회복지사가 되어 클라이언트와 라포를 형성할 때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 기억 덕분에 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려 노력하게 된다. 생각이 깊고 눈매가 예뻤던 S, 그녀가 어디선가 행복하고 지혜로운 중년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