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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오늘

내가 글을 쓰는 이유

by 온현

자라며 내 어머니에게서 본 한결같은 모습은 '책임감과 헌신'이었다. 경상도 집안의 맏며느리로 평생 순종을 미덕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맏딸인 나 역시 주부가 된 후 그 길을 따라 걸으려 했다. 내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미덕은 순종하며 책임을 다하는 것인 줄 알았기에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내가 배워온 사랑은 그저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었고, 전문가로서 일하고 강단에 설 때의 나와 주부이자 며느리로서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농담처럼 시댁에 가면 모든 자아를 다 벗고 무수리 모드를 장착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만능,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다.


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 며느리, 딸, 친구, 직장인, 크리스천으로서의 역할. 이 모두를 잘 해내기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는 오랫동안 몰랐다. 사람에 따라 여기에는 다양한 길과 해답이 있을 것이다.


내가 찾은 답은, '나를 잘 챙기기', 나부터 사랑하기'였다. 책임감으로만 충만해 달리던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먼저 행복하고 충만히 채워져야 한다는 것, 그때 비로소 주어진 많은 관계들을 진심으로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무리하는 생활이 누적되니 당연한 결과로 건강을 잃었다. 늘 괜찮은 줄 알았던 내면에 여러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압박과 불안, 염려가 넘실넘실 차올라 있었다. 뒤늦게 깨달은 순간, 나의 우선목표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부터 살리기'가 되었다.


내 안의 객관성, 진심 어린 배려와 여유는 나 자신을 먼저 존중하고 대접해야 온전히 체화되는 것이었다.


내 감정의 계좌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혹시 마이너스 잔고는 아닌지 소진(burn out)되지는 않았는지 잘 살펴야 하듯, 신체의 안녕도 소중히 돌보아야 했음을 40대에 건강을 잃고야 알았다.


그 절망의 순간, 삶과 그 안의 관계들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내면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옛날 같으면 할머니가 되고도 남았을 나이가 되었다. 이제야 글을 쓸 최소한의 체력이 회복된 지금이다. 짧은 글이나마 지치지 않고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거의 포기했었던 일상의 회복, 이 선물 같은 시간을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 누리다니!

이런 오늘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글을 쓰며 더 행복해지고 있듯이 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행복과 작은 쉼이 전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 안에 고여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살포시 꺼내어 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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