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을 준비하는 시간
당연한 일처럼 연말연시에는 늘 새해 계획을 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일일 듯하다.
나의 신년 시작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가지 과정이 더해진다.
25세 이후 나는 신년수첩에 새해 계획과 함께 유언장을 작성해두곤 했다. 25세는 평균적으로 성장이 끝나고 노화가 시작되는 나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 무방비하게 던져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유언장 쓰기였다.
말은 유언장이지만, 거창한 내용은 아니었다. 평소 고마웠던 이들에게 전하는 인사. 나머지는 내가 갑자기 사망하더라도 남은 이들이 덜 당황하도록 정리할 것을 담은 글이었다.
그럼에도 이 알량한 유언을 쓰다 보면 이제까지의 내 삶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새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더 신중한 사색이 되는 순간이다.
또 한 해의 시작을 앞두고 있다. 올해는 어떤 것을 유언에 더 쓸까 잠시 고민해 본다.
가진 것이 적었던 과거에는 유언도 간단했다. 그동안 감사한 사람들에 대한 인사를 남기고, 하찮은 소유물의 분배를 적으면 끝이었다.
최근에는 이전 것의 수정ㆍ보완이 대부분이라 감사한 사람들과, 부탁할 일들을 넣거나 뺄 뿐이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다. 나이가 든 만큼 책임질 관계들이 많아졌고, 생활 속 가진 것들도 늘어났다.
다만 변함이 없는 것은, 유언을 쓰는 동안 감사한 일들을 평소보다 세밀히 기억하게 된다는 점이다. 새해를 계획하는 일과 함께 유언을 작성하며, 죽음이 아닌 또 한 해의 삶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커지곤 했다.
유언장 작성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이가 서른, 마흔... 앞자리가 달라질 때마다 조금은 더 성장해 있었어야 할 것 같아 초조했던 듯하다. 서른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나이이자 아주 중요한 시기 같았지만, 지나고 보면 매 해가 늘 새로웠다. 삶은 아무리 소소해 보여도, 하루도 특별하지 않은 날이 없는 항해와 같았으니.
'어떤 사람, 어떤 삶이어야 잘 흘러갈 수 있을지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어차피 삶은 죽음을 향해가는 과정이라는 것.
새해를 맞으며 유언장을 쓰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치열하게 살아보겠다는 나만의 다짐이었다. 유언장이랍시고 써 가는 시간은 한 해 동안 얽힌 실타래를 풀고 새로 달리기 위한 준비 같기도 했다.
실제로 감사한 일을 적다 보면, 내가 받고 누린 그 마음들이, 순간들이, 따스하게 반짝이며 나를 다독인다.
유언장은 고마운 이들에게 남길 나의 감사편지이기도 하다. 처음에 치기 어린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덧 삶을 소중히 여기게 해 주는 나만의 특별한 통과의례가 되었다.
곧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시작점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매일의 삶, 매년 돌아오는 새해가 더 이상 새롭지 않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신년을 맞아 유언을 써 보면 어떨까. 어쩌면 다시 한 해를 열심히 뛸 시작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