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일생

아들이 무어라고

by 온현

어린 시절 방학마다 외가에서 보냈던 내게, 외할머니는 제2의 엄마 같은 분이다. 나의 유년은 매해 여름과 겨울 내내 외할머니께 받은 사랑으로 많은 부분이 채워져 있다.


방학마다 손자, 손녀들을 데려다 돌보신 나의 외할머니.


오래전 작고하신 외할머니는 어린 아들 둘을 6.25 전쟁 통에 잃으셨다. 딸 넷만 남고 단산하자, 집안 회의 끝에 시오촌 조카가 양자로 들어왔다. 젊었던 할머니는 생때같은 아들 둘을 잃은 후 딸들에게 살림을 맡기고, 아들을 잃고 생긴 화병을 다스리기 위해 담배를 배우셨다. 30대 후반에 골초가 되셨던 할머니는 타고난 위엄이 있는 어른이셨다.



할머니는 맡겨진 아들을 정성껏 길러 대학 졸업 후 결혼할 때 집을 마련해 주셨고, 제사를 맡긴다는 이유로 재산도 아들에게 모두 증여하셨다. 나의 엄마와 이모들은 외할머니의 마음이 편하시면 됐다고 상속을 포기했다.


할머니는 입양한 아들을 그 옛날에 대학 교육까지 시키셨지만, 할머니를 닮아 똑똑했던 딸들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못 갔다. 남녀 차별 속에 자란 딸들은 자식 교육 때 한을 풀었다. 교육의 기회를 차별받지 잃고 자란 할머니의 외손녀들은 대부분 대학원까지 진학해 전문직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셨다. 동네 사랑방에 가서 소일하시는 것이 일과인 외할아버지 대신 집안을 혼자 돌보셨다. 각종 대소사와 경제를 도맡아 관리하며 외가를 지켜낸 여장부이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희고 날씬한 미인에다 음식솜씨도 좋았다. 당시에는 드물게 조카들까지 유학을 가고 외국대학의 교수가 된 집안의 딸이시기도 했다.


부족함 없는 삶처럼 보이는 외할머니의 유일한 결핍은 '제사를 맡을 아들'이었고, 그 결핍은 내내 그 삶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과묵한 분이었지만, 외손녀인 내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티 나게 기뻐하셨다. 손주도 차별하신다 싶어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먼저 태어난 여동생의 딸은 그리 반기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그때는 어려서 외할머니의 아픈 속을 이해해드리지 못했다. 나 자신이 보수적인 경상도 집안의 외며느리로 한참 살아낸 후에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외할머니도 어쩔 수 없는 전통 사상의 희생자였음을. 외할머니는 자신의 생각을 시대에 맞춰 배운 대로 적응하며 살아내신 것뿐이었음을.


외할머니의 모든 선택에는 며느리가 되었으니 제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뿌리 깊은 자의식이 있었다. 그 자의식은 아들딸을 최대한 차별 없이 키우려 노력하신 내 엄마의 무의식에도 깊이 뿌리내릴 만큼 강력했다.


아래 세대인 나는 크리스천이라 제사의 압박을 끊을 수 있었지만, 남편이 외아들이니 아들이 없었으면 시부모님께 설움을 많이 받았을지도 모른다.


외할머니의 시대에서 겨우 두세 세대가 지났다. 지금은 오히려 아들들이 역차별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사회적인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마 나와 같은 세대이셨으면 외할머니의 삶의 선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기업가나 대학교수쯤 되시지 않았을까. 그 재능이 한 맺힌 담배연기와 함께 묻혀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제사, 아들. 그게 무어라고 윗 세대 여성들의 삶을 속박했을까. 아이는 혼자 낳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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