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감사일기
시 한 줄 쓰지 못하고
버석버석해진 마음을 짊어진 채
그저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시인은 못 되어도
지혜로운 이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은 날들
삶에는
감당할 십자가가 빼곡하다
다만, 감사하게도
딱 깜냥만큼만
차례로 등에 짐 지워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요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아들의 결혼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드리퍼를 꺼내다 삼사 일 전 갈아놓은 원두를 그라인더에 둔 채 방치해 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주방 한쪽에서 착실히 향을 잃어가며 온갖 향을 흡착했을 원두.
다시 갈기가 귀찮아 그냥 커피를 내렸다.
금방 갈아서 내렸을 때보다 확연히 향이 밋밋하고 맛도 탁하다. 자세히 음미하면 어딘가 최상의 맛이었을 시절의 흔적이 느껴질 거라 위안하며 커피를 마셨다. 당연히 신선한 맛은 아니었지만 카페인의 각성효과는 그대로였다.
생각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식어가는 커피의 맛이 우리의 삶 속 무겁고 씁쓸한 고민들을 닮았다. 머릿속에서 고난과 결혼에 대한 단상이 오간다.
그래, 어쩌면 우리의 삶에 드나드는 고난과 깊은 고뇌들도 비슷할지 모른다.
때로는 둔탁하고 어둡지만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흔적이 배어, 지나고 보면 감사한 성장기가 되기도 하는 어떤 것... 지나고 나야 의미를 알게 되는 무엇. 그래서 결국은 감사하게 되는 일들이 더 많았다.
상처 없는 삶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상처를 잘 보듬어주는 마음속 둥지를 갖고자 한다. 그 노력의 결과 중 하나가 결혼이 아닐까.
한참 사랑을 키워가는 연인에게는 그저 즐겁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사랑이겠지만. 십자가를 멘 채 가시면류관을 쓰고 죽음으로 걸어간 골고다의 여정이 있어야 부활의 기쁨이 온다. 트리를 장식하는 기쁜 오너먼트들은 모두 그 과정을 겪은 후의 열매인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 후에는 다양한 과제를 해결하며 한 발씩 성장해 간다. 남부럽지 않은 시집살이와 마음고생을 하는 이도 생겨나고, 갈등으로 아예 결혼이 해체되기도 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언제나 기쁨만 존재하는 파랑새의 삶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더 많이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위 시를 쓴 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삶은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저 기쁜 날에는 자랑을 절제하며 고이 간직하고, 슬픈 날에는 문제를 단순화하며 풀어갈 뿐이다.
오늘의 커피는 최상의 향미 대신 잠시 생각을 바로 할 여유를 주었다. 그것으로 감사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