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텐동

2020년 1월 3일

by 선량한해달

"어린이날도 이런 어린이날이 다 있네요."


아마도 오늘이 사무실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정대리는 티에프실 앞의 좁고 긴 통로를 지나 드넓은 사무실로 걸어 나온다. 날이 날인가 보다. 텅 빈 사무실을 각 처 막내들이 한둘 남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전략처를 홀로 지키는 강사원과 자연스럽게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한다.


"대리님, 힘드시죠?"

"아뇨... 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먼저 말을 건넨 쪽은 언니였다.


"언니는 티에프 몇 번이나 해보셨어요?"

"...많진 않아요."


언뜻 들려오는 소문으로 추측건데 이전 기관에서의 티에프는 그리 아름다운 결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눈앞의 이 언니가 굳이 다운그레이드해서 액세스공사의 신입으로 입사한 이유가 바로 그 티에프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같은 기관에서 넘어온 액세스 공사의 윗분들은 그 티에프에 대해 익히 알고 있고, 그러한 연유로 강사원을 대하기 어려워한다. 정대리는 순간 괜한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제 앞길이 안 보이는 입장에서 한 명 정도의 친구는 필요한 법이다.


"그... 좋지는 않았던... 거죠?"

강사원의 긴 속눈썹이 눈앞의 물컵에 드리운다. 물컵을 두어 번 만지작하더니 강직한 속눈썹이 입을 연다.


"더러웠어요."


언니의 한 마디에 덩달아 길어지는 속눈썹이다. 한동안 대화가 끊겼지만 텐동과 에비후라이동이 각각의 눈앞에 등장하자 부정한 기운이 싹 사그라든다.


"와, 언니 오늘 대성공인데요?"

"그러게요, 제대로 하는 집이었네요."

"아니 이런 데를 두고 왜 맨날 국밥집엘 가는지... 값도 비싼데 말이에요."

"저희 이번 주에 콩나물국밥 다섯 끼 먹었잖아요."

"미쳤다, 정말."


바삭한 일본식 튀김에 어우러진 짭짤한 양념이 꼬들한 백미에 스민다. 김이 모락 피어오르는 행복이 뒤덮인 점심식사다. 두 사람은 때로는 맛을 탐구하며, 때로는 신세를 한탄하며 한 그릇을 개가 핥은 듯이 깨끗이 비워낸다. 하고 싶은 말이, 해주고 싶은 말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쌀알 하나하나에 감겨 뚫린 목구멍을 통과하자 다시금 그 기운이 드리운다.

"...뭐래요?"


이번에도 입을 먼저 연 것은 언니였다.


"네?"

"뭐 하는 티에프래요? 시기가 안 좋잖아요. 그나마 헌 사장 기리는 티에프면 다행이지만..."


'후웁.'


짧게 한숨을 내쉬는 정대리를 보고는 입이 닫혀버리는 강사원이다. 무섭고 쓸쓸해진다. 아마도 더 힘든 일일 게다. 입사했을 때 이미 사록이 나왔으니 더 이상 헌 사장을 기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갈 놈은 가면 그만이다. 그놈이 내뱉은 선심성 발언을 수습하는데 수년이 걸릴 뿐. 강사원은 이전 기관에서의 자기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무섭고 쓸쓸해진다. 정대리도 마찬가지다. 한기가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장국은 다 마시고 나면 꼭 이렇게 춥다니까요."


애써 말을 돌리는 정대리다.


"국 추가될걸요?"

"그런가?"

"보통 양배추나 국은 더 주니까."

"맞네. 언니, 우리 일본집 앞에 정말 맛있는 텐동집이 있었어요. 그때 유명했던 타베로그에 맨날 올라오고 그랬었는데. 전국 1등도 몇 번 했지 아마? 짜지도 않았고 딱 적당한 맛이었거든요. 아, 거기는 가지를 튀겨서 올려줬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가지가 그렇게 맛있는 건 줄 몰랐었어요."


급히 말이 많아진 정대리가 방향성을 잃자 강사원이 적절히 끊어낸다.


"뭐든 가장 신선할 때 수확해서 튀기면 맛있죠."


또다시 두 속눈썹이 아래를 향한다. 정대리는 빈 장국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감사랑 얽히려나?"


정대리는 대답 대신 장국과 따끈한 차를 한 잔 추가하고는 두 손을 만지작대다 겨우 입을 연다. 행동이나 표정에 끊김이 없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아뇨."


강사원도 어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뾰족한 수가 없는지 갑자기 커피 한 잔을 시키고는 태연히 입을 연다.


"...그래요."


커피와 차가 충전되자 대화가 급물살을 탄다.

"대리님은 왜 바지만 입으세요?"

"아, 전 다리가 안 예뻐요."

"진짜요? ...그런 이유였구나."


강사원은 도입 연수 때 본 확고한 정대리의 스타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무언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지는 않을까 늘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정대리의 입이 터진다.

"여기 와서 아저씨들한테 털리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치마 이미지로 남고 싶지 않다는."

'그러면 그렇지.' 생각하는 강사원이다. 티스푼을 휘젓고는 정대리를 스윽 한 번 보고는 느린 속도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꽤 길었던 공감의 시간은 말 없이도 어색하지 않았다.

"사실... 지아 보면서 더 느꼈어요."

"감사실 이주임님요?"

"네, 그때 비서 발령 나기 전에 오른쪽 막내들 중에 여자는 저랑 지아 둘이었거든요. 둘 중에 한 명 보내자고 말이 나왔었는데 그 친구 이미지가 더 비서에 가까웠는지... 울고불고 역정 내고 난리였지..."


강사원은 입사 후 조직도를 본 순간, 감사실 사원이 대표이사 비서를 겸임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화감이 들었었다. 당시 최사원의 비서에 대한 편견에 대항하느라 곧 잊은 감정이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 나니 그 당시의 위화감이 조금 해소되는 느낌이다.


"지아가 최대 피해자지..."


제 걱정이 남에게로 향하는 정대리다.


"괜찮을 겁니다."

"네?"

"죄의식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강사원을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정대리다.


"이주임님은 그만큼 승진이 빠르실 거예요. 그렇게 희생도 당했으니 다음번 발령에 안 챙겨주기 어렵잖아요. 미혼에 성격도 있으시고요. 실장님이 안 올리고는 못 배기실걸요? 거기 구성이 협소해서 대리 티오 하나일 텐데... 저는 윤주임님보다 이주임님이 먼저 승진하신다고 봐요."

"그러면 다행인데. 또 모를 일이죠, 실장이 날아갈지도..."


멈칫하는 정대리다. 강사원이 틈을 파고든다.


"그러네요. 워낙 변동이 많으니... 심신이 갈려도 그걸 아는 윗놈이 남아있고나서의 문제죠."

"언니도 참... 힘들었겠다."


식어가는 커피와 차를 형식상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어간다.


"언니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요?"

"이전 기관에서 같이 일하시던 분들이 널렸잖아요."


강사원은 정대리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는 그냥 막내나 하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정대리의 본심을 담은 질문이 날아든다.

"복수하실 건가요?"


잠시 온몸의 행동이 멈춘 강사원과 대답을 기다리는 정대리의 그림이 사뭇 진지하다.


"아, 전 또 뭐라고..."


강사원은 급작스레 온몸의 긴장을 풀고 커피잔에서 티스푼을 빼 받침 오른편에 가지런히 걸쳐놓는다. 그런 다음 적당히 식은 커피를 크게 꿀꺽 들이켜고는 말을 이어간다.


"복수보다는 기원? 인간은 남의 불행을 원한다는데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전 저한테 잘못한 사람들이 불행하길 바라지는 않아요. 그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길 바랄 뿐이에요."

"같은 말 아녜요?"

"전혀 달라요. 그들 자체는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다 가도 돼요. 저는 그들 사후에 죄 없는 그 자식들이, 그 자식의 자식들이 줄곧 불행하길 기원하고 있어요. 살면서 문득 생각날 때마다 진심으로 기원해요. 그게 더 좋지, 잔인하고. 안 그래요?"


정대리는 강사원의, 아니 눈앞의 믿음직한 언니의 의외의 일면을 발견하고는 웃음반 놀람반으로 입이 반쯤 열리고 말았다.


"언니도 인간이네. 큭."

"그럼요, 제가 얼마나 재수 없는데요."

"또 무슨 생각해요?"

"음... 저 새* 어차피 나보다 먼저 죽는다?"

"아, 이 언니 왜 이래. 미치겠다. 크크"


눈앞의 강사원이 의외로 지아 주임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웃던 정대리가 웃음을 멈추자 같이 웃던 강사원도 웃음을 멈춘다. 커피와 차의 바닥이 거의 드러난다.


"대리님은 뭐가 되고 싶으세요?"

"저요? 저 벌써 서른이 넘었는데 뭐가 되고 싶어야 하나요? 꿈이 없어진 지 오래예요."

"꿈같은 거창한 거 말고요. 그냥 유치원 애들이 막 던지는 것처럼 뭐가 되고 싶다 그런 거 없으세요?"


정대리는 생각을 한다. 오랜만에 생각이란 걸 하며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걸 느낀다. 굳이 오늘, 이 시간에, 이 언니와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로 결정한 스스로가 대견하다.


"음... 저는 치킨이 되고 싶어요."

"치킨요?"

"적어도 순간의 위로는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한테도 남한테도."

강사원이 의문을 제기한다.


"근데... 죽어야 되잖아요. 죽고 토막 나서 튀김옷 입고 끓는 기름에 들어가야 되는데?"

"에이, 괜찮아요. 억울하지만 않으면. 그전에 죽이고 토막 내서 튀김옷 입혀서 끓는 기름에 넣으면 돼지. 그럼 안 억울하잖아요."

"어우, 너무 잔인하다!"


호탕한 웃음으로 한 식당에서 식사와 후식까지 마친 두 사람이 격한 입을 씻어낼 양치 도구를 찾아 지옥으로 복귀한다. 번쩍이는 건물로, 찬란한 카펫 위를 걸어, 최신식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거대한 창조물 속 개미 같은 두 생명이 잔혹한 마음을 서로에게 드러내고는 멀뚱히 변하는 숫자를 쳐다본다.


"대리님."

"네, 언니?"

"결정은 미룰수록 나은 경우가 많더라구요."

"네, 언니."




2020년 1월 3일 금요일 맑음


<전략처 송과장> 아니 괴질 대책 방안이 어디가 있어

그놈의 방침, 방침, 방침. 몇 개를 쓰는거여, 응? 이 짓거리도 더는 못하겄단 말이지, 응? 방침 받으면 거 또 내 이름 붙어서 나갈 텐데 나중에 뭔 꼴 날려고, 응? 강미리 저거는 일 더 시켰다가는 내가 쓰레기 될 것 같고, 이대리는 뭐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읍어. 나오지도 않고는. 응? 아주 그냥 잘 돌아간다. 팀 꼬라지 봐라. 으이그... 이제 곧 오십줄인데 인생 좀 편해질 줄 알았드만 우째 이런고.


<감사실 유실장> 우리도 한 놈 올려야지

택이가 고생은 했지만 희생은 지아가 했으니. 6급, 5급 우리 보기엔 별 거 아니라도 애들 사이에선 그게 아니지. 앞으로 강짱돌이 문제 치고 나가려면 일해본 택이가 필요한데 유약한 성격이 문제야. 일이 길어지면 받아낼 성격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단 말이지. 상황에 따라서는 떠안고 버티거나 사라져줘야... 어차피 정대리가 일을 할 줄 아니까. 강미리, 강미리. 그게 제격인데 왜 또 전략에 가서 박혀있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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