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고오~ 보니까 자알 쉬었네. 때깔이 곱고, 응? 아하~주 좋아 보여. 응."
전염병과 새 사장 부임 확정으로 연초부터 바빴던 전략처에 드디어 뉴페이스가 등장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감귤초콜릿을 돌리던 이로운 사람은 심기가 불편한 송과장의 핀잔에 몸 둘 바를 몰라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이대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쓰일 대로 쓰인 강사원의 깊은 곳에는 꽁한 마음이 있었지만 인간 방패가 사라졌던 지난날에서 해방된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미리씨, 무슨 일 있어?"
"아뇨."
낮은 목소리로 뒤늦은 분위기 파악에 나선 이대리다.
"근데 과장님 왜 저러셔?"
"글쎄요? 저도 잘..."
강사원은 정대리의 자리에 앉은 해로운이 여간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방패가 없는 것보다야 낫지만 아직 어색한 사이다. 살갑게 구는 것도, 말을 놓는 것도 불편하다. 이대리가 없으면 송과장이 불편하고, 송과장이 없으면 이대리가 불편하다. 최사원까지 현장으로 사라지니 새삼 내가 이 부서의 '막내'라는 사실이 와닿는다. 몇 년만의 막내인가.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 안고 가야지 생각하며 피어오르는 꽉 막힌 마음을 다잡아 보는데 소회의실로 숨어들었던 송과장이 급히 양복을 입고 이대리에게로 향한다.
"어이, 이로운이, 오늘 나랑 세종."
"!"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이대리가 송과장과 강사원을 번갈아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사장님 오시기 전에 한 번은 가야 할 거 아녀."
"네? 아..., 아. 사장...님."
묘하게 안 맞는 대화에 성질 급한 송과장의 얼굴이 붉게 피어오른다.
"뭐여, 미리씨 말 안 했어?"
"네??"
괜한 불똥이 강사원에게로 튄다.
"아니 둘이 연락 안 해? 응? 거, 잘 하드만 정대리랑은. 응? 여튼 따라 나와. 빨리 옷 갈아입고."
"...옷."
이대리는 뽀송했던 엉덩이골 사이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새 사장이라니, 세종이라니, 옷이라니. 전략처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회의 진행하는 부서 아니었던가. 새로운 부서의 조급증 상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뇌가 새하얘진다.
"저...옷. 없는데요."
"..."
송과장은 자신의 신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끊어지는 소리도 들린 것 같다. 1월이 시작되어 6일이나 지난 시점이다. 하마터면 목구멍까지 치솟은 무거운 보따리를 이대리의 면전에 풀어놓을 뻔 했다. 시야의 여백에 희미하게 들어온 강사원이 이대리를 살렸다. 막내 앞에서 대리를 혼내는 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다. 송과장은 간신히 이성을 붙들고 '허이고호!' 한숨을 쉬고는 사무실을 떠난다. 이대리와 강사원은 이 애매한 분위기 속에 남겨지고 말았다.
'뭐야, 또 왜 저래? 성질머리 진짜.'
강사원은 기복 있는 송과장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사심위 자료에 집중한다. 타닥타닥 키보드음이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퍼져나간다. 이 말 같지도 않은 글자들의 나열을 또 어찌 조정할지 눈앞이 캄캄하다. 심의를 통과시키려면 될 걸 해야 하는 거고, 안 될 거면 말이라도 잘 풀어내야 할 텐데 왜 심의해달라고 오는 사업마다 이 지경이란 말인가. 정대리의 등짐이 내게로 제대로 옮겨왔구나 생각하며 혀끝을 차는 순간,
"거, 왜 말 안 해요?"
이대리가 침묵을 깬다.
"네?"
강사원은 손을 멈추고 시선을 모니터에서 이대리에게로 옮긴다. 이대리의 굽이치는 곱슬머리가 땀에 젖어 엉겨 붙었다. 이렇게나 당황할 일이었던가. 그제야 이대리를 제대로 본 강사원은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대리의 캐주얼 복장에 눈이 꽂혔다.
'뭐야? 저 바지는... 토요일이야?'
이대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힘준 눈으로 바라보는 강사원이 못마땅하다.
"아니, 거.. 새 사장님 오신다고 알려줬어야지."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이대리다.
"오늘 세종 간다고 알려주고 옷도 준비하라고 말해줘야지, 미리씨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정보를 놓친 것은 본인이다. 말도 안 되게 연말과 연초에 연차를 붙여 쓴 탓 아니었던가. 전략처 사람이 정장 한 벌 없이 회사를 다니는 게 말이 되나? 덕분에 바쁜 연초에 짊어진 짐이 갑절로 무거워졌었건만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그러니까. 제가요?"
강사원은 이 사람이 지금 갑질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송과장과의 마찰로 감정이 상해 그것을 부딪칠 누군가가 필요한 것인지 파악하려 건조하게 되묻는다. 이럴 때일수록 담담해지는 N년차 사회인이다. 의외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에 지지 않는 이대리다.
"그쵸, 미리씨가 막낸데 누가 해? 과장님도 그러시잖아. 왜 안 알려줬냐고."
"세종 가시는 건 저도 오늘 안 사실이에요. 새 사장님 오시는 건 말 나온 지 몇 달이나 지났고요."
"아아니, 그게 아니고오. 내가 오래 쉬었잖아. 그럼 중간에 한 번 정도는 보고해줘야 되는 거 아냐? 우리 막내들은 안 시켜도 다 잘해."
"지금까지 저희는 그런 거 한 적 없습니다."
강사원은 아마도 나보다 어리고, 경력도 짧을 어린 사회인을 상사로 맞아 오랜만에 이전 기관에서의 막내 시절을 떠올려본다. 월요일에, 연초에, 그것도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전략처 인간이 청바지에 운동화라니. 애초에 이 사람은 전략처 일에 대해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정대리가 얼마나 성숙했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기유."
"...뭐?"
"송과장님은 기밀유지 문서 받고 움직이세요. 별동대 같은 거예요. 저한테는 일정 공유 안 하세요."
강사원은 느린 속도로 마우스를 쥐고 회의, 사심위, 통계 자료 창을 하나씩 내려 감춘다. 메일함을 띄워놓고는 모니터를 돌려 이대리 쪽으로 향하게 하고 메일 수신함의 제목들을 왼손목을 대충 흔들며 가리킨다.
"보시다시피 저는 기유 메일 받은 게 없습니다."
이대리는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유는 뭐고, 기유 메일은 뭐고, 별동대는 또 무어란 말인가. 그보다 지금 이게 기어오르는 건가?
"아, 뭔 소리야! 그래서 앞으로도 이렇게 사람 바보 만들겠다고?"
모니터를 가리키던 강사원의 검지 손가락이 끊어지듯 굽는가 싶더니 거의 동시에 이대리 쪽으로 고개가 홱 돌아간다.
"이대리님!!"
큰 목소리에 놀란 이대리가 주춤한다. 재무처 사람들까지 흘깃 뒤를 돌아본다.
"므... 뭐요."
"열어보세요, 메일함."
"?"
"저렇게 나오시는 거 보면 대리님한테만 보낸 기유 문서가 있었겠죠. 막내까지 알면 안 되는 일인 것 같은데요."
그제서야 서둘러 메일을 열어보는 이대리다. 긴 휴가 동안 강사원이 공람한 공문들만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공람인은 강사원이다. 화가 치민다.
"에이씨, 뭔 공문을 이렇게 쓸데없이..."
초반에 저 해로운 인간의 성향을 미리 파악할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는 강사원이다. 그리고 잠시 후, 툴툴거리며 바쁜 손을 놀리던 청바지 인간이 이윽고 깨달음을 얻는다.
'혹시 외부 메일?'
컨트롤키 두 번에 망전환과 함께 이대리의 등골에 땀이 바짝 흐르고 만다.
'[기유]**부 신임 장관 업무 보고의 건, [기유]취임식 시나리오 검토의 건, [기유]TF 협조의 건...'
그곳에는 줄줄이 늘어선 기유 메일이 15통. 이대리의 외부망 용량을 다 잡아먹으며 수많은 첨부파일을 토해내고 있었다. 용량 문제로 문서를 열어볼 수도 없는 이대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때마침 자리를 비운 IT처 사람들 중 누구라도 하나가 복귀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2020년 1월 6일 월요일 흐림
<전략처 송과장> 저거 언제 가르쳐?
뭐어? 응? 옷이 없어요오? 응? 아아니 몇 년을 회사를 다니면서 우리 일을 그렇게 모른단 말여? 정대리 입고 다니는 거 보면 몰러? 강사원 입고 다니는 거 보면 모르냐고. 눈만 달려있으면 다 아는 걸, 에이그, 참. 저거 전략일 해보겠다고 그렇게 알랑알랑 방귀 흘리고 다니길래 또 건져왔지 내가. 아니 근데 지가 최유빈이 투여 뭐여. 대리씩이나 달고는. 대리도 아니지. 저거 이제 과장 군번 아녀? 제 2의 최유빈이가 되면 어쩌자는 거? 미리헌테 가르치라고 할 수도 읍쟈녀. 된 놈을 골라와야 허는 건데. 담배 좀 알고 술 좀 마시길래 인간 됐다 했더니. 숫자만 알지 저건 뭐, 하아.
<전략처 이대리> 말을 해주든가
뭐가 이렇게 불친절해? 갖다 바친 게 얼만데. 첫날부터 분당까지 전화해서 IT 막내 불러다가 용량 늘리고 파일 열고 이 개고생을 하네.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썽을 내? 회사 운명이야 이미 정해진 거... 대통이 까라면 까는 거고, 장관이 접으라면 접는 거지. 뭘 그리 싸돌아 댕겨. 옷 깨나 차려입고 장차관 만나고 국회의원 만나니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한차장한테 기어오를 때부터 어이가 없었다고. 옷은 또 어디서 사란 거야? 타이도 하나? 에이씨. 뭔 놈의 부서 일이 이래? 하여간 오른쪽 놈들, 일도 더럽게 못하지. 같지도 않은 일만 모아서 싹 다 하고 앉았네.
<TF팀 정대리> ...
이게... 그런 거였어? 그게...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