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님이 차 받아오시면 비서실이 움직인답니다. 저희는 통로 문 막고 대기하라세요"
내주 월요일, 드디어 새 사장이 온다. 채택된 시나리오를 펼쳐 들고 이대리와 강사원이 소회의실에 틀어박혀 벌써 수십 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다. 송과장은 지난번 실장님 취임식 때랑 얼추 비슷하니 긴장할 거 없다는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바삐 사라져 버렸다. 늘 이런 식이다. 이대리와 강사원, 그 누구도 액세스의 취임식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대리는 듬직한 형일 줄 알았던 송과장의 행태가 영 못마땅하다.
"에이씨! 그만합시다."
"네?"
"암 것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해서 뭐 돼요?"
"..."
강사원은 모처럼 이대리에게서 이로운 소리를 들었다. 막막한 것은 강사원도 마찬가지다. 소회의실에 적막이 드리운다.
"...거, 뭐, 그쪽 공사에선 안 해봤나?"
"취임식은..."
"거기 어엄청 사장 갈리고 막 그러지 않았던가?"
"저는 그 시기에 티에프에 있었어서요."
"아... 티엪..."
'!!'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 사람을, 아니 구원자를, 잔다르크를 떠올렸다.
'벌컥!'
"정민 대리!"/ "대리님!"
"!"
내리다만 드립포트에 쫄쫄쫄 제법 고르게 물이 고인다. 이대리는 제대로 갖추어 신지 못한 슬리퍼의 한쪽 발이 꺾인 채로 정대리의 시야에 들었다. 문틀의 한중간에 그 꼴로 서있는 모양새가 가관이다. 티에프실의 작은 문틀이 마치 큰 프레임 같다. 간절하게 숨을 몰아쉬는 이대리라는 애처로운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정대리는 모처럼의 커피타임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앗, 뜨거!"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다부진 왼손의 포트에서 크게 한 줄기 끓는 물이 선을 이탈한다. 정대리의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적시고는 그대로 스타킹발 위로 주루룩 흐른다.
"엇, 정대리..."
"어!! 어!! 언니 또 그런다!"
낭랑하고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 그곳에는 낡은 소파에 내려앉은 감사실의 망령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대리와 강사원은 일제히 이주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골방 정대리의 정반대편에 앉아 있던 이주임은 정확히 사각에 들어있었다. 응급 처치에는 자신 있는 이대리였지만 정대리와 이주임 사이에 끼어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유, 진짜!"
고개를 홱 돌려 이대리를 흘겨보는 이주임이다. 멋쩍어 시선을 피하다 못해 아예 고개를 돌린 이대리가 몸을 어중간히 굽히고는 골방으로 입장한다. 강사원도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골방으로 들어선다.
"아유, 그냥 정신 사납게. 여기가 어디라고 그냥 막 들어와 들어오길! 전화라도 한 통 넣고 오든가, 손가락 빨개진 것 봐. 언니 타이핑도 못하게 생겼네. 이거 화상이라 내일 되면 더 심해지는데에!"
타박하는 소리에 점점 더 작아지는 이대리다. 강사원도 면목이 없어 문 옆 의자에 가만히 앉는다. 정대리와 이주임이 정사각형 티에프실의 북쪽 메인 데스크, 강사원이 서편 출입구 옆 의자, 이대리가 조금 전까지 이주임이 앉아있었던 남쪽 허름한 소파에 자리 잡았다. 각자 동서남북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모습이 흡사 생존게임에 초대된 참가자들 같다. 혹여 이주임이 원래 앉았던 제 자리인 남쪽 소파를 탐한다면 이대리는 홀연히 일어나 아무것도 없는 동편의 벽에 기대 설 것이 분명하다.
"됐어, 지아야. 이제 됐어."
"되긴 뭘 돼? 빨갛잖아. 바세린이라도 발라. 여기."
"물 많이 식었었어. 괜찮아."
이주임은 입을 왼쪽 볼에 바짝 붙이더니 홱 돌아 소파로 돌아간다. 자연스럽게 이대리 옆에 앉는 이주임이다. 의외로 이대리가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 나란히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서둘러 물을 훔친 정대리가 입을 연다.
"두 분 무슨 일이세요? 전략처에 뭔 일 났어요?"
이 때다 싶은 이대리가 미사일처럼 날아와 정대리에게 바짝 다가선다.
"우리 좀 살려줘봐, 정민씨."
"네?"
"하, 씨, 그 송과장 그 새* 그거 인간 아니드만. 아니 어떻게 버텼..."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험담에 고개를 뒤로 빼는 정대리다. 내용 면에서는 100% 공감하는 바이지만 느닷없는 들이닥침에 험담까지 늘어놓은 모습이 평소의 이대리답지 않다. 긍정적이고 재치 넘치는 영업 이대리의 모습이 아니다. 눈앞의 이 사람이 누군가 싶다. 정대리는 밀려드는 험담을 흘려버리고는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려 긴장된 상태로 앉아 있는 강사원에게 눈짓한다.
"...대리님."
나지막이 낸 목소리는 줄줄이 늘어지는 험담 속에 쉽게 묻혀버렸다. 강사원은 결심한 듯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이대리에게로 다가간다. 어린아이를 진정시키듯 가만히 어깨를 짚고는 힘을 줘본다.
"대리님, 정대리님은 상황을 모르십니다."
급히 소음이 사그라든다. 일시정지한 이대리는 앞으로 숙인 자세를 서서히 펴고는 뒷머리를 긁적인다. '따각 따각' 반대편 소파에 앉은 이주임이 손톱 깎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운다. 세 사람은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일제히 바라보고는 가만히 원상복귀한다. 어색도 이리 어색할 수가 없다. 강사원이 결심한 듯 정대리와 눈을 맞추며 입을 뗀다.
"정대리님, 다음 주 취임식 말인데요."
"아, 그거."
짧고 영혼 없는 정대리의 대답이다.
"네, 그게... ... ..."
큰일이다. 말을 꺼내긴 했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아예 진행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방황에 새삼 당혹스럽다. 옆에 멀뚱히 선 과장 군번이라는 낡은 대리도, 타기관 경력이 긴 나도 처음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괴감이 든다. 질문할 능력도 없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언니, 동선 아세요?"
정대리의 역질문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가라앉고 말 강사원이었다.
"네?"
"취임날 동선요. 우리가 차 받고, 이후에는 비서실이 움직이거든요."
정대리는 알고 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송과장이 흘린 말과 같다. 정대리는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 그래, 그 동선. 그거, 알려줘요."
내다 놓는 걸 깜빡한 신발장 옆 음식물 쓰레기봉투처럼 축 늘어져있던 이대리의 눈이 반짝인다. 질문을 할 수도 없었던 두 사람의 상태가 정대리를 만나 급히 호전된다.
"큰 틀은 전략처와 비서실의 협업이라고 보시면 돼요. 송과장님이 차로 사장님 받아오실 거예요. 그건 아시죠? 전략이 스타트하는거죠. 도착 후에는 비서실이 움직여요. 비서실이니까 당연히 사장님 수행하는 거. 비서실에서 취임식 진행 일정 보고하면서 식장인 19층 대강당으로 사장님 받아서 이동시킬 거예요. 우리는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 문을 다 오픈해놔야겠죠? 19층 엘리베이터에서 강당까지 이어지는 통로 문도 다 열어두고요. 비상구 엘리베이터로 움직이시기 때문에 문이 굉장히 많아요. 전략은 두 분이시니까 한 분은 취임식장 세팅하시고 다른 한 분이 지하부터 19층까지 문을 다 스톱퍼로 열어두셔야 해요. 사장님이 식장에 도착하시면 비서실이 빠져주고요. 전략이 취임식을 진행하면 돼요. 식 끝나면 다시 비서실이 수행하고요."
얼추 이해한 이대리는 잠시 머릿속이 하얘진다. 영업 시절에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곤 했었는데 식을 하나 치른다는 게 이렇게나 복잡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 그러니까. 지하 1층부터 19층 강당까지 이동하는 길을 막힘없이 만들라는... 건가?"
"맞아요."
정대리는 간단한 걸 뭐 그러냐는 듯 한껏 미소를 띠며 이대리와 강사원을 번갈아 바라본다.
"정대리님."
가만히 듣고 있던 강사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 문이라는 게. 몇... 개나 되나요?"
미소 속의 정대리가 다정하게 답한다.
"스물 세 개요."
2020년 1월 9일 목요일 흐림
<전략처 이대리> 안 해. 못 해.
하, 시*. 전략일 한다더니 문지기 하고 앉았네. 성과급 좀 더 받자고 이런 뒤치다꺼리까지 해? 군대보다 더 해 그냥, 더러운 새*들. 그동안 뒤에서 이런 일 하고 살았었구만? 오른쪽은 고개도 돌리지 말라 그랬었는데 내가 미쳤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딴 거지 같은 부서엘 왔나. 내 이 입을, 손을 조져야 돼. 송과장 그놈도 이제 입 싹 씻고 짬처리? 내가 가만있나봐라.
<전략처 강사원> 이놈의 만능부서
탓하지 말자. 기획, 전략, 경영 이딴 이름 붙은 곳에서 풀어먹고 산 내 잘못. 여기도 만만찮네... 작은 공기업이라 덜하려나 했더니... 그치, 회사 입장이 있는데 더 했음 더 했지. 미덥지 못한 그 분이 취임식날 한 명분을 해줘야 할 텐데. 분장을 어떻게 나누려나... 잠깐만, 그 사람 강당 세팅 해본 적 있나? 혹시 유빈이 보다 더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