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의 망령

2020년 1월 10일

by 선량한해달

"준우 니도 올라가 봐라."


새 사장이 온다는 소식에 현장이 들썩인다. 곧 있을 조직개편에 누가 본사로 가고 누가 현장으로 올지 점쳐보는 일상이다. 현장에는 본사를 갈망하는 사람들도 있고, 본사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도 있다. 노조의 핵인 신위원이 본사로 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 하나 눈에 띈다. 최담당이다.


"거 전략에 유빈이 자리 비지 않았어? 거기 대리도 티에프 가서 없지 않나?"

"유빈이 뭐 하다 왔어? 준우가 본사 놈들보다 일은 훨씬 잘한다이?"

"경평 기준 같은 거 아나? 내평도 니들이 했지?"

"거 뭐냐, 거, 공시도 해봤어?"


최담당은 온갖 직설적인 질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회의만 주구장창 진행하다 왔다고 차마 입을 열 수 없는 것이다. 현장의 애송이가 괜한 전략처 딱지가 붙어서는 어우러지지 못하고 여전히 겉돌고 있는 와중이다. 사장은 왜 이 타이밍에 오며, 준우 선배는 또 왜 인사발령 물망에 올라 이 사단을 만든 걸까? 그보다. 나는 언제쯤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최담당은 구석의 작은 의자를 찾아 몸을 숨기기로 했다.


"저 안 가요."


시선은 출무 서류에 고정한 채로 최담당을 향해 조용히 언질을 주는 신위원이다.


"네?"

"본사 안 간다구요. 저 사람들 자기들이 가고 싶어서 그래."

"아, 네..."


갑작스러운 결론에 최담당은 귀가 새빨개진다. 잠시나마 준우 선배를 향한 부러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 자리로 간다느니, 거기 대리 자리가 빈다느니 하는 말들이 확실한 상처로 다가왔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됐는데, 지난 발령의 억울함과 원통함이 도통 사라지질 않는다. 이게 트라우마라는 것인가, 앞으로 발령 때마다 이러려나, 이런 멘탈로 이직은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졸린 사슴눈으로 고개가 까딱이자 온몸에 힘이 빠진다. 최사원은 최근 들어 부쩍 몸이 늘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돌아가고 싶죠?"

"..."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죠?"

"..."


용케도 마음을 꿰뚫은 준우 선배다. 이럴 땐 꼭 정대리를 보는 것 같다.


"네."

"오, 멋지다. 솔직하네."


여전히 눈은 정면을 고정한 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신위원이다. 멀티에 젬병인 최담당의 눈에는 한 손으로 게시된 공문에 의미 없는 서명을 휘갈기며 대화도 곧잘 이어가는 신위원의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굳이... 숨길 것도 없어요. 저 이직 준비하는 것도 아시죠?"

"음, 그건 몰랐지만 서울대 나온 신입이면 우리 회사 다니긴 좀 아깝죠. 놀랄 것도 없지."

"...네."


"대리님은..., 아니 위원님은 본사 싫어하시나 봐요."

"내가요? 아뇨?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뭐. 입사해서 배치받은 데가 본사면 본사 가는 거고, 현장이면 현장 오는 거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노조는 다 본사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노조도 뭐 하고 싶어서 하나. 하라니 하는 거죠."


최담당은 신위원의 담백한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편견 없는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럼... 본사로 가게 되면 가실 수도 있겠네요?"

"응, 뭐, 그렇죠. 근데 안 가지? 굳이 왜 가."

"왜요?"


신위원은 돌연 거북이목을 하더니 주위를 빠른 속도로 흘끔 살피고 최담당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고 간신처럼 속삭인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잘해놨는데, 갈 때 가더라도 4급은 달고 가야지."

"...아!"


최사원은 즉각 납득했다. 현장에서 누군가가 승진한다고 했을 때 이견 없이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내 눈앞의 신위원이라는 것은 이미 현장에 배치된 첫날 감각적으로 알게 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서울대 나온 놈들 둘 있는데, 한전이랑 수력원자력에 있거든. 가보니 좋다더라고요, 한적하니."

"좋겠네요."

"큭, 진짜 부럽나보다."

"...아, 뭐, 그냥."


마음 속 생각이 밖으로 새어 나와 버렸다. 어째서인지 준우 선배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고 만다. 오늘은 유독 부끄러움이 많은 날이다. 붉게 달아오른 볼을 숨기려 의자를 뒤뚱 숙여 방향을 돌린다. 출무와 서명을 마친 신위원은 그런 후배가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건방지기도 해서 재미가 있다.


'정민이네가 재밌는 놈을 줬네.'



"아효오오, 이번엔 승진하려나."


이른 점심을 해결하고 저스트 12시에 사무실로 복귀한 이대리가 들으라는 듯 주위를 살피며 곡소리를 한다. 이대리는 운이 없었다. 과장만 셋 있는 부서로 입사한 것이다. 액세스 같은 신생 공기업은 경력직이 많아 과장 적체 현상이 눈에 띈다지만 과장 적체는 결국 대리 적체다. 매해, 매달, 매일 이러다 대리로 정년 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전략의 송과장을 구슬리기 시작한 것도 압박감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무실 왼쪽에는 곧 육휴를 마친 과장단이 돌아온다. 사실 이미 돌아왔어야 했다. 헌사장의 버티기가 길어지며 조직개편이 늦어졌다. 이 때문에 육휴 연장이 줄을 이은 것이 이대리에게는 천운이었다. 노조에서도 이에 발맞추어 한 아이당 휴직 기간을 수개월씩 늘렸다. 이러한 움직임에 시간을 번 이대리는 지난달 전략처의 해체를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왼쪽에는 더 이상 이대리가 설 곳이 없다. 기술처나 시설처에 비벼볼래도 '쯩'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 이름을 보고 진학처를 정할 것이 아니라 특수대를 갔어야 했다. 공자 붙은 곳에서 밥벌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명문대 경제학과 졸업생은 최근 몇 년간 그 시절 본인의 어린이스러움을 탓하며 많은 날을 참담하게 보냈다.


"전략 일 해보는 거 어때?"


의외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한차장 쪽이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이대리를 데리고 있었던 한차장은 누구보다 이대리를 걱정했다. 신경 쓰였다. 똘똘한 놈이 하필 영업에 와서 승진길이 막혔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대리에게 중부본부가 있다면 이대리에게는 영업처가 있다. 정대리에게 본부장님이 계시다면 이대리에게는 한차장님이 계시는 것이다. 직장인에게 있어 고향이란 나에게 유리한 곳이지 처음 시작한 곳이 아니다.


"지박령이냐? 갔다 와. 과장 달고 나면 데려오게."


사무실 정반대편의 전략처라는 곳이 묘하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던 것도 그쯤이었다. 애연가인 송과장에게 그 어렵다는 담배 택배를 수량과 날짜를 계산해가며 정기적으로 보냈다. 바둥바둥 바쁜 정대리가 택배 셔틀을 하는 모습에 미안해지기도 했지만 위로를 구실 삼아 전략처에 자주 얼굴을 비출 수 있었다. 전략처의 뉴페들과도 안면을 텄다. 지난날 정대리와 친분을 쌓고 전략처를 드나들고, 결국 정대리가 자리를 비워주기까지 이대리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다.


새 사장이 오면 조직개편이 시작된다. 그 시기에 맞추어 일찌감치 재구성을 마친 전략처에 안착한 이대리는 비교적 여유롭고 안락하게 이 시기를 관망할 수 있다. 승진만 무사히 된다면 말이다.


'우당탕탕'


한가로운 푸념과 회상 타임을 과감히 쳐부수고 등장하는 송과장이다. 저돌적인 멧돼지 같은 발놀림이다. 너덜너덜해진 잿빛 재킷을 공격적으로 벗어 책상 위에 널브러뜨리고는 이대리와 강사원을 향해 툭 한 마디를 내던진다.


"굴국밥!"


외마디 비명 같은 그 한 마디에 이미 배가 부른 이대리도, 점심 짝 없이 조용히 제 자리에서 커피 타임을 즐기던 강사원도 군말 없이 그를 따라나선다. 두 번째 점심을 향해 나아가는 무거운 이대리의 발과 자유시간을 빼앗긴 강사원의 느린 발걸음이 슬픔과 비참을 흩날리며 오른쪽 공기를 가른다. 어딘가 굴국밥한 금요일이다.




2020년 1월 10일 금요일


<전략처 송과장> 내 언제까지 이러고 사누

공자 달면 따순데서 일하고, 몸고생 안 허고, 밥 안 굶는다던 어무이는 틀렸고, 응? 뭐 직장 생활을 해보셨어야지. 울 어매, 불쌍한 울 어매. 그렇게 알고 살다 가셨으니 뭐, 됐고, 아들 춥고 배고픈 거 모르고 가셨으니 됐고. 새파란 사무관들한테 욕먹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범죄상인 국회의원한테 쪼이고... 만나주지도 않을 거면서 공문은 왜 보낸담? 허, 참. 아들놈의 새*같은 보좌관이... 뭐? 일을 이따위로 하냐고? 회사 없어지고 싶냐고? 국민의 뜨읏?? 뭐언 뜻? 선거철 다가오니 가관이구먼, 응? 가관이여. 하이고. 두야, 하!


<전략처 강사원> 나도 난데 너도 너다

점심 먹고 들어왔단 한 마디만 해줬어도 쓸데없는 음식을 위장에 쏟아붓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도 난데, 너도 너다. 점심을 두 번이나 먹으면서 내색도 안 하고 사는 모습이 몇 년 전 나 같아서 보기 싫다. 그렇게 살 거라고, 보상받을 거라고, 성공할 거라고... 그 믿음에 배신당하는 게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 적어도 여기, 강처장 아래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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