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씨, 3번으로 가기로 해에따."
"넵."
그래도 시무식이라고 오랜만에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강처장이 7개의 시나리오 중 3번이 채택되었음을 툭 알린다. 참으로 친절하다. 강사원은 지긋지긋한 송과장보다야 어색한 강처장이 낫다는 마음으로 모니터를 쏘아본다. 시나리오 한 개당 5시간. 이대리 이건 어디서 뭘 하는지 6일까지 째놨으니 모든 것은 강사원의 몫이다. 시나리오 3번이라 함은 새 사장의 취임이 확정되었다는 말이다. 오늘의 메인은 시무식이 아니다. 대가리 없는 시무식 따위 강처장 주관으로 간단히 마치면 될 일이다. 이후 새 사장 취임식에 관한 논의가 메인이 된다. 주력 시나리오 두 개에 맞추어 인쇄해둔 회의 자료를 들고 회의실로 뛴 강사원은 능숙하게 자료를 깔고 다과는 생략한다. 입이 마를 취임식 논의를 위해 생수만 한 병씩 세팅한다.
"어이구우~ 명색이 시무식에 회의실이 이게 뭐래. 과자 하나는 있어야지 미리씨."
"..."
들을 필요도 없는 멍청이들의 핀잔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강사원이다. 바삐 생수를 세팅하고는 슬라이드를 확인하는 모양새가 매섭다. 시나리오가 뒤늦게 확정된 탓에 급히 마이크 위치 조정까지 해야 한다. 회의실에 가까운 기술처와 시설처 인원이 모두 입실했다.
"기 차장님, 죄송합니다. 마이크 위치 좀 바꾸겠습니다."
디귿자 끝 부재중인 기술처장 대신 자리 잡은 기차장은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강사원의 움직임과 매서운 눈빛에 의자를 뒤로 밀어 몸을 빼준다. 얘는 여기와서도 전략이다 기획이다 하는 몹쓸 부서에 얽혀 이 고생이구나 싶어 마음이 짠하다.
"항상 바쁘네. 강대리."
"뭐, 그렇죠."
급히 마이크를 이리저리 바꾸고는 테스트 음성을 흘려보낸다. 낭랑한 음성이 회의실 사방 벽을 때린다. 완료다. 허리춤에 한 손을 얹고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강사원이다. 입바람에 앞머리가 휘날린다.
"이야~ 정대리랑은 또 다른 맛이 있네 그래. 목소리가 그냥 기상캐스터 같어~!"
살짝 기분이 나쁘다. 사람은 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목소리 후기나 읊고 있을 땐가? 바보병이 옮겠다 싶어 서둘러 몸의 방향을 튼다. 자꾸만 심기를 건드리는 날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귓뒤로 넘긴다. 그때 기차장의 간략한 질문이 급히 이동하려던 강사원의 발목을 붙잡는다.
"오는구만?"
"네?"
"새 사장."
"..."
"아아, 말할 필요 없어. 그걸 알고 싶은 건 아니니까. 보니까 마이크 위치가 그렇잖아."
괜히 차장이 아니다. 사장 공석 시에는 항상 가운데를 차지했던 전략처장의 마이크가 다른 처장들의 마이크와 같은 선상으로 이동했다. 디귿자의 가운데를 비우고 양 사이드로 정렬한 처장단 마이크의 모습에서 변화를 감지한 것이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오늘 시무식 한대? 아직 사장도 없는 마당에, 회의 자료도 다 흑백이고. 이 분위기면 기술처 발표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우리 막냉이가 개고생 하면서 한 달 매달렸다."
강사원은 이럴 때가 제일 힘들다. 한 실무자의 소중한 수면과, 식사와, 배변의 포기, 그의 뼈와 살로 만들어진 자료가 갑자기 길고양이도 거들떠보지 않는 돌멩이가 되어버리곤 한다. 그 순간을 관장하는 것이 바로 회의 담당인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 아냐아냐, 강대리가 뭐가 죄송해. 우리 막냉이가 좀... 알잖아. 우리 회사 입장. 회사가 이 지경이니 기술 발표를 뭐 할 수나 있어야지. 요즘 침울해. 그니까 다음 주라도 발표는 할 수 있게 해줘. 그 정도는 할 수 있는거잖아?"
"...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그리고 강대리."
"저, 차장님."
"응? 어어, 말해."
"저 사원입니다."
'그렇구나.' 기차장은 생각한다고 붙인 대리 호칭이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 듯 턱과 귀를 번갈아가며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터치하더니 템포를 두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얼굴로 말한다.
"지랄 마, 강대리."
2020년 1월 2일 목요일 맑음
<기술처 기차장> 사람 쓸 줄 모르는 놈들
저건 이번 승진 인사 있고 나면 내가 데려와야지. 아는 거 많은 놈을 저 딴 데다 굴려? 사람 쓸 줄도 모르는 놈들이 말야. 우리 회사 전략이 뭘 한다고... 어디 뭐 주무부처가 상대를 해줘, 국회의원들이 상대를 해줘. 하라면 그냥 하는 거고 말라면 그냥 마는 것들이 할 게 뭐 있다고. 다른 기관이면 똑똑한 놈이 거기 있어도 된다 이거야. 근데 여긴 아니지. 강짱돌이, 송보강이 둘이면 할 거 다 하는 건데 그 아랫놈들은 노예야 뭐야? 빼앵뺑 서무만 들입다. 강대리는 내가 더 잘 키울 수 있어.
<전략처 강미리> 뱀은 뱀끼리
기태림 차장님. 참 고마운 분이다. 드물게 객관적이고 이쪽 사람 같지 않은 데가 있달까? 사기업 있다 오셨던가? 스페셜리스트만 아니면 같이 일하고 싶은 분. 하지만 나랑은 가는 길이 다르니까. 회계사는 회계사끼리. 변호사는 변호사끼리. 기술사는 기술사끼리. 우리 같은 무면허 사짜들은 사짜끼리. 싸움도 터가 있다고 나는 강짱똘이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