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공의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한해달 Jul 12. 2022

똥개

2020년 3월 2일

 "메일 하나 보냈는데 별 거 아냐, 그냥... 저 뭐야, 엑셀 태워서 긁어서 재무 쪽에 보내요."


 이책임의 무책임한 토스로 업무가 하나 추가된 강주임은 차오르는 욕을 씹어 삼키고 인쇄기로 향하던 발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온다.


 '별 거 아니면 지가 하지.'


 회의로 한산한 월요일 아침에 떨어진 일이 반가울 리 없다. 어른들이야 지옥의 월요일이지만 어린이들에게는 모처럼의 휴식이다. 강주임은 그 휴식을 날려버린 잡무가 무언지 궁금하다. 자리로 돌아와 딸깍 딸깍 여유로운 손가락으로 포털의 메일함에 접속한다.


 「이거요~」


 '예의 없는 새*!'


 제목에서 느껴지는 캐주얼함이 강주임의 심장박동에 작은 영향을 준다. 적어도 기재부문에서는 처음 보는, 형식이고 뭐고 없는 참신한 메일 제목이다. 내용은 없고 파일만 두 개 덜렁 첨부되어 있다.


 '신사업_수요_예측_비용.xlsx'

 '점심_회계.xlsx'


 우선은 가볍게 '점심 회계'를 열어보기로 한다. 딸깍 열리는 파일에는 기재부문 전원의 이름이 표로 정렬되어 있다. 도통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각 이름 아래 10만 원씩의 보증금이 담보로 잡혀 있다. 강주임은 영문모를 표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이것은 고민을 더 해도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결론내린다.


 "책임님 이게, 뭐죠?"

 "응? 아 그거, 영업에서 하는 신사업인데 비용 좀 태워 보내달라 그러네. 별 거 아니니까 쭉 긁어서..."

 "아뇨, 이거요."


 모니터를 억지로 돌려 이책임에게 점심 회계 파일을 보이자 단연 얼굴에 화색이 도는 이책임이다.


 "아아, 그건 영업에서 막내들이 하던 건데 엄청 효율적이고 좋거든. 10만 원씩 통장에 입금하고 한 명이 잔액을 관리해주는 거야. 기재부문도 야근 많잖아? 한 명이 그거 해주면 팀이 엄청 스무~스하게 돌아간다고."

 "..."

 "벼, 별 거 아냐, 그냥 10만 원씩 냈는지 확인해서 월초에 알림 보내주고. 월말에 누가 얼마 더 먹고 누가 얼마 덜 먹었는지 정산해주면 돼."

 "..."

 "왜? 어려울 것 같아서 그래? 숫자라서? 진짜 별 거 아닌데?"


 강주임은 영업 쪽 사람들이 왜 도망치는지 알 것 같다. 영업에 배치된 동기 단이가 언젠가 단톡에서 말했던 '다 미쳤어.'의 의미가 단번에 와닿는다. 일도 아닌 것을 일로 만들어대는 상사가 있는 한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이걸, 최단 주임이 계속했나요?"

 "아, 단이가 하다가 숫자 자꾸 틀려서 재무에 유미씨가 해줬었어."

 "네?"

 "거긴 어차피 숫자를 보니까. 별 거 아니잖아."

 "이거, 상당히 별 거 같은데요."

 

 "왜, 하기 싫어?"

 "지금 기재부문 열 명이 넘습니다."

 "그러니까 하기 싫으냐고."

 "동의는 다 얻으신 건가요?"

 "하기 싫다는 거네."

 "매월 10만 원을 걷는 것도 문제지만, 당장 매일 누가 뭘 먹었는지 어떻게 알고 잔액을 관리하죠?"

 "아니, 그게 뭐가 어려워? 영수증 받으면 되잖아. 거기 이름 쓰고 메뉴 적으면 되지."

 "누가요?"

 "이봐 이봐, 하기 싫다는 거잖아."

 "야근은요, 누구는 식비를 쓰고 누구는 안 쓸 텐데요."

 "먹은 사람 중 하나가 영수증 관리해서 강주임한테 다음 날 주면 되지."

 "잊어버리면요."

 "월말에 누락된 거 정산할 거 아냐?"

 "누가요?"

 "강주임!"

 "이책임님!!"


 언성이 높아진다. 한 명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효율성이란 무너지게 마련이다. 심지어 효율적이지도 않지 않은가. 과연 몇이나 이 계획에 동의할 수 있을까. 잘 걸렸다 오늘 한 번 논리로 싸워보자 마음먹은 강주임이 한 껏 열을 올리려는데 익숙한 능구렁이 한 마리가 스륵 귓전에 대고 한 마디를 날린다.


 "거, 내가, 내가 하자 그랬어, 응?"

 "..."


 회의를 마치고 나온 송수석이 이책임 옆의 제 자리로 이동하며 슬그머니 이책임의 제안에 동의의 뜻을 내비친다. 강주임은 송수석이 이런 잡무를 통해 한 사람의 희생을 시험하는 인물은 아니라고 확신하지만 팀의 장이 결정한 일에 토를 달 수는 없다. 치밀어 오르는 화가 눈 끝까지 찬다.


 "거, 해보면 별 거 아니고, 응? 재무 쪽에는 내가 설명할 거고, 응? 거, 저쪽 공사에서도 그렇게 많이들 하고, 응? 미리씨도 알 거 아녀?"


 그 유명한 저 쪽 공사에서 수년을 일하며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점심 회계 파일이지만 이렇게 되면 거부할 수 없다.


 "언제부터... 하실 건가요?"

 "아, 응응, 오늘부터 해."

 "보증금 10만 원 입금은 이미 되어 있는 건가요?"

 "아, 그거 알림 메일부터 보내고, 응?"


 '조금 전 자기가 설명한다고 하지 않았어? 저 머저리가!'


 "통장은 미리씨가 만들면 되겠네. 점심때 한 10분 먼저 나가요."

 "..."


 대꾸도 하기 싫다. 아직 통장도 없는 건가? 단 두 사람의 작당모의로 이루어진 역대급 잡무가 강주임 앞으로 떨어졌다. 심기가 불편하다. 저들은 생각만 앞선다. 모든 일은 강주임이 해야 한다. 진행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도 감수해야만 한다. 10분으로 점심시간 통장이 만들어질 리가 없다. 강주임은 탁탁탁 소리를 드높이던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휴대폰을 집어 든다. 앱으로 통장부터 만들기로 한 것이다.


 「3월분 점심 대금(각 10만 원 정) 입금 알림의 건」


 안 할 수 없다면 빨리 끝내버리자. 나야 대충 하다가 분위기 파악해서 이직하면 그만이다. 강주임은 마지막 직장으로 삼으려 했던 액세스공사에의 하직에 대해 구체적으로 계획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알림 메일을 발송한다.


 "아, 아까 말했지만 그, 그거, 그건 그냥 긁어서 재무 쪽에 보내요."

 "네?"

 "에이씨, 몇 번을 말해, 신사업 파일!"

 "..."


 아, 맞다. 하나 더 있었다. 별 거지 같은 일에 정신을 사로잡혀 나머지 파일 하나를 미처 열어보지 않은 강주임이다.


 '딸깍.'


 반응 없는 파일이다.


 '응? 뭐가 이리 버벅대?'


 로딩에 한참이 걸린 파일이 열리고 눈앞에 영원한 스프레드시트가 펼쳐진다.

  

 "복리후생비, 소모품비, 판관비, 기타여비....."


 2015년도부터 줄을 잇는 회사의 비용이 무한한 숫자로 얽혀있다.


 "이게 뭐죠?"


 이책임은 뭘 또 그런 걸 다 물어보냐며 귀찮다는 듯 대꾸한다.

 

 "아, 거 보면 몰라요? 비용이잖아."

 "이걸 제가... 뭐 어떻게?"


 "에이씨!"


 이책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강주임 자리로 다가선다.


 "이렇게. 이렇게 긁으라고. 됐죠? 안 어렵죠?"

 "..."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의 비용을 다루는 부서가 아닌 곳에서 다뤄도 되는 자료인가. 내가 봐도 되는 부분인가. 애초에 이것은 무슨 신사업에 필요한 비용인가. 그런 종류의 문제인 것이다.

 

 '뭐야, 시트가 또 있는데?'


 두 번째 시트는 더 가관이다.


 "유니폼, 테트라광역무전기, VHF무전기..."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현장용 항목들이 늘어서 있다.


 "현장 시트는 어떻게...?"

 "또 뭐요, 봐봐."


 두 번째 시트는 이책임에게도 당혹스럽다. 태어나서 처음 본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자아를 굽힐 수는 없다.


 "거, 긁어. 그냥 4년씩 태워."

 "그럼 세부항목이 안 맞는데요."

 "에? 뭐가?"

 "여기 참조요. 유니폼은 교체 주기가 2년이지만, 가방은 5년입니다. 여기 무전기도 광역 교체주기와 VHF..."

 "거, 되게 말 많네. 그냥 긁어서 넘겨요. 재무에서 알아서 하겠지!"

 "..."


 강주임은 이책임 너머 땀만 삐질 흘리고 있는 송수석을 주시한다. 주식에 열중한 나머지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는 굽은 등이 분노를 돋운다.


 "그럼, 시키신 대로만 해서 보내겠습니다."

 "내가 뭘 시켰다 그래. 그냥 긁는 걸 뭐 내가 시켜야 하나?"

 "..."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이책임은 이책임대로 점심 회계 파일부터 단단히 뒤틀린 심사다. 그래, 같이 죽자. 강주임은 이런 찝찝한 업무에 손을 대는 것이 내키지 않지만 어차피 죽을 거면 다 같이 엮어 죽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자고 다짐한다. 그때였다. 재무 쪽에서 세차게 손을 흔드는 선량한 시민이 등장한 것은.


 "여기요, 여기, 여기. 강주임님! 이거, 나는 빼줘요. 뭔 점심 값을 걷어? 북한이야?"

 



2020년 3월 2일 월요일 흐림


<기재부문 송수석> 팀에 금이 가네 금이 가

 정민이가 있을 땐 참 평화로웠고. 성격 비슷헌 두 놈 붙여두니 바람 잘 날이 읍어. 이책임... 이책임. 고것이 일로 이겨야 하는데 자꾸 수를 쓴단 말이지. 허기사 뭐 우쩌겄어? 영업일이야 알겄지만 보고 부서에서 일을 해 봤어야지. 지도 죽을 맛일 거구먼. 강주임도 성격 좀 죽이면 딱 좋겠는데  지질 않어. 지질. 강주임, 아니, 강대리는 부문장님 바뀌고 나서도 데리고 있어야 헐텐데...


<기재부문 이책임> 저것들이 또 지*이네

 숫자도 볼 줄 모르는 것들이 때마다 영업 숫자가 틀렸네 어쩌네 해대더니 이젠 점심도 같이 안 먹겠다? 지들은 기재부문 아냐? 회사원 아니냐고. 부문장 회계사라고 지들도 특별한 줄 알! 기재부문은 재가 아니라, 기라 이거지. 부문장들 자리 비웠다고 기세등등해서는... 암것도 없는 놈들이. 강짱돌이는 소문이 흉흉한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에이씨, 과장 달러왔더니 위아래로 털리다 못해 이젠 재무까지 합쳐지고 지*이네.


<중부본부 쏭책임> 태림이형?

 어머나, 자리를 아주 기가 막히게 더럽게들 비워놨네. 내가 저기 가 박히면 자기는 어디로 간다는 거야? 육휴 동안 조직도가 아주 다른 회사같이 싹 변했어 그냥. 모르는 이름들이 왜 이렇게 많아? 어린이들이 많네. 어디 보자... 기재부문부터. 송.. 에이씨, 이 새*는 가는 데마다 눈에 띄어. 술맛 없게. 이... 얘는 모르겠고. 강...미리. 강...미리? 강미리? 그 강미리?

매거진의 이전글 다이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