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씨! 우리가 뭐 봉이야? 아니 지들이 무슨 독립부서도 아니고! 달라 그래! 마감이 17시 아냐? 내가 영업 때도 정민씨한테 마감을 안 지켜준 적이 없어요. 매너지, 매너."
난처하다. 이제는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된 재무다. 재무는. 바쁘다. 항상. 바쁘다. 재무쪽 동기에게 메신저를 보내보려해도 영업쪽 점심 식비까지 맞추고 있을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주춤하게 된다. 재무쪽 회의 자료는 어차피 수석급으로부터 나온다. 막내에게 접선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비밀이 뭐 그리들 많으신지 회의 자료가 완성된 직후 부문장이 나타나서는 내용에 난도질을 한다. 난도질당한 후의 회의 자료는 장갈이를 한 듯 새로운 내용들이 빼곡히 들어서 닥달해 받아낸 사람이 공연히 죄스러워지게 마련이다. 기획과 재무의 관계가 좋지 않은 시점에서 강주임은 매주 살얼음을 걷는다.
"왜요? 뭐, 또 껄끄러워? 내가 가?"
어이가 없다는 듯 비스듬히 꺾은 고개로 강주임을 노려보는 이책임이다. 눈치가 보인다. 송수석이 이책임에게 무게를 실어주기 시작한 후부터 점점 더 괴로워지고 있다.
'7년 만에 막내 하려니 돌겠네...'
회의 자료는 어차피 강주임의 손을 거쳐 주말에 재정비를 해서 나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지만 현실이 그렇기에 제출 마감을 지키는 부서는 일반적으로 없다. 갑자기 들이닥쳐 마감 시간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것으로 마찰이 생기면 내 꼴이, 기획 꼴이 뭐가 되나. 그런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주무관과의 통계 자료 반출입도 오늘이 마감이다. 지금 재무쪽 회의 자료가 들어온다 해도 강주임 본인이 볼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일어서야 한다. 액션을 취해야 한다.
가능한한 천천히 실내화에서 빼낸 부은 발을 펌프스에 구겨 넣는다. 단정한 검정 가죽이 오늘따라 뒤꿈치에 빡빡하게 걸린다. 가죽 리본이 스타킹에 거친다. 기분이 안 좋다. 두어 번 발을 넣었다 뺐다 하며 구두를 제대로 신고는 재무 쪽 동기 유미의 눈치를 살핀다. 구부정한 인상파의 다가오지 말라는 아우라가 단단하게 정돈된 구를 그리고 있다. 그 옆 재무 사람들에게서는 왜인지 모를 불꽃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따금씩 팍 하고 터지는 불발된 불꽃놀이의 그것과 같은 잔잔한 화염이 재무 전체를 뒤덮고 있다.
'하아!'
한 걸음 한 걸음이 주옥같다. 평상시 하던 대로 칼퇴들이나 하시지 왜 다들 남아서는 이 거지 같은 블랙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 금요일 야근은 회의 자료를 제출하지 못한 사람들과 그 취합의 핵인 기획의 막내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 꺼져라. 그게 정해진 룰이다. 억지 걸음이 점점 더 속도를 낮춘다.
'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때였다.
'우당탕탕!'
갑작스레 날아든 급박한 동음에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한 곳을 주시한다. 얼이 빠져 있던 강주임은 모두가 본인을 주목하고 있는 것에 놀라 얼굴을 붉히며 행동을 멈췄다가, 수많은 시선이 스쳐 지나는 위화감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방금 전까지 내뿜던 아우라는 온데간데 없이 무방비한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고 서있는 유미의 시선을 짚기로 한다. 그의 시선은 강주임의 왼쪽 어깨를 지나 아슬아슬 붉어진 귀를 타고 뒤로 연결되어 있다. 긴장된 마음으로 가만히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신다만 양말 한쪽을 가슴 앞주머니에 쑤셔 넣고 뛰쳐나온 멧돼지 한 마리가 서있었다.
안경 사이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훔치며 자리로 돌아가 제 가방을 대충 들고는 부문장의 자리를 쓱 훑어 쏜살같이 퇴근하는 송수석이다.
'수석님이 사무일에 있었어?'
"차, 차장님! 차... 아니, 수석님, 같이가요! 수석님!"
휴대폰을 잠시 확인하는 듯 주춤하던 이책임이 윗옷을 의자에 걸어둔 채로 가방만 들고는 뒤따라 뛰쳐나간다.
'뭐지?'
방금 전까지 회의 자료를 받아내라며 언성을 높이던 놈과 사무실에 있는 줄도 몰랐던 놈. 두 놈이 휩쓸고 간 기획의 터에는 말끔한 구두를 꼭 맞게 신고 서있는 강주임만이 단정한 치맛자락을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언니."
멍하니 서 있는 강주임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재무의 유미다.
"어? 어, 어, 그래. 아니아니, 저기, 죄송해요. 엄주임님 혹시 재무 쪽 회의 자료..."
"잘 된 거죠?"
"네?"
"언니한테... 잘 된 거죠?"
"...뭐가요?"
"미리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어? 정책임님."
언제 다가왔는지 기척도 없이 뒤에 바짝 붙어선 정책임이다.
"잘됐다."
"네?"
"공문 확인해요."
"공문요?"
"메일이랑."
"메일요?"
"그럼, 저는 감사실 내려가봐야 해서."
"아, 네. 또 뵈어요."
"자주 볼 듯."
강주임은 정책임의 부쩍 마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상큼한 윙크와 대비되는 평소보다 더욱 펄럭이는 바짓자락이 균형을 해치고 있다. 강주임은 부동자세로 몇 초 버티다 몸을 돌려 제 자리로 향하기로 한다. 걸음을 거듭할수록 점점 속도가 난다. 신경질적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대기화면을 해제한다. 포털에 접속할 때마다 안 맞는 비밀번호가 또 말썽이다.
'3개월에 한 번씩 바꾸라니까 이 지경이지!'
오늘도 페이지 한 장을 넘기기 어려운 포털이다. 공문을 봐야 한다. 공문이다. 공문. 공문.
'맨날 ERP 개선 작업이네 뭐네 하더니!'
IT부문의 생고생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개선이 정말 되고 있는 걸까? 왜 수개월간 이상태 그대로...
'팟!'
「인사발령(직위해제알림의 건)
1. 기획재정부문 1급 강종두 직위해제
2. 기획재정부문 1급 서원일 직위해제
3. 인사노무부문 1급 백상욱 직위해제
4. 사회공헌부문 1급 박인화 직위해제
5. 영업관리부문 2급 전호중 직위해제
6. 안전관리부문 2급 연희명 직위해제
붙임 상세 1부. 끝. 」
'진짜... 였구나.'
눈앞이 까마득해진 강주임은 온몸에 힘이 풀린다. 또 하나의 열지 않은 공문이 있다. 손가락을 대충 옮겨 습관적으로 마우스를 가져간다. 이미 재난급의 공문을 봤다. 뭐든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으리라. 퇴근 시간이 지났다. 안 보는 게 나으려나? 괜히 열어봤다 일거리가 떨어지면 내 손해다.
'응? 정책임님이 공람까지 걸어두셨어?'
결국 타고난 기질을 이겨내지 못한다. 들어와 있는 공문은 봐야 직성이 풀리는 강주임이다.
「인사발령(인사이동 알림의 건)
1. 시설관리부문 2급 기태림 기획재정부문장에 보함
인사노무부문장(겸직)
2. 감사부문 2급 유재희 사회공헌부문장에 보함(겸직)
3. 중부센터 3급 송아리 시설관리부문에 보함
4. 중부센터 6급 최유빈 시설관리부문에 보함
발령일자: 2020년 3월 9일부. 끝.」
'...'
강주임은 마음 속에 어떠한 감정이 생겼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정체모를 감정이다. 고개를 비집고 틀어 올려 오른편 창가 쪽을 멍하니 바라본다. 3월의 맑은 저녁놀이 기다란 부문장 책상의 관상용 식물을 관통하고 있다. 주인 없는 식물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다음 주면 저 아이들을 전부 치워야겠지, 팔다리가 고장 나겠구나, 운동화를 챙겨 와야겠다 등의 생각을 하며 스산한 사무실을 걷기 시작한다. 공문 두 장에 모두가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과연 기획의 막내만이 남은 금요일의 사무실이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니 평상심이 돌아온다. 회의 자료 따위 안 들어와도 그만이다. 부문장들이 없는 회의가 진행될 리 없다. 지난 주 회의 자료로 대충 버무려봐야겠다. 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일순간에 부서장급이 세트로 증발한 적은 없었는데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렇게 되면 사장도 버티지 못한다. 조직개편이 또다시 사무실을 뒤흔들 것이다. 다음 번 개편 때는 어디가 내 자리일 것인가. 한동안 회사가 시끄러울 것 같다. 오늘은 9시 뉴스를 꼭 봐야겠다.
"어, 강대리."
"엇, 넵. 차장, 수석... 아니, 부문장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기획에서부터 시설까지 걸어와 있다.
"아, ...저, 기획 쪽 정수기가 고장 나서..."
"그래? 거기께 더 새 거 아냐?"
"아, ...넵."
"우리 회의 자료 들어갔나?"
"아직 확인 안 했습니다."
"그렇지. 미리 확인하면 화만 나잖아. 어차피 안 들어올 거."
"..."
편한 자세로 시설 관련 자료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는 기수석의 능청에 막연한 심정이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한다. 생각해보니 이 동네 자료는 다 저렇게 거대한 종이로 되어 있었다. 에이포에 갇힌 기획과는 다르다. 새삼 두 곳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눈 앞의 능력자가 부러워진다.
"알고... 계셨습니까?"
"응."
"이제... 그럼... 어떻게..."
"음..., 강대리도 참 운이 없어."
"..."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 판 떠나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번역만 하고 살아도 충분해. 프랑스어 희귀하잖아. 프리랜서가 싫어서 그래? 막말로 결혼할 것도 아니고. 체면 챙기지 말고 그냥 돈만 보고 맘 편히 살아. 여기 여우 같은 놈들 다 제치고 늘그막에 1급 달면 퍽이나 좋겠다. 이 판에 여자는 쏭이 하나다. 10년째 3급. 회사 바꿔도 3급."
"..."
기수석은 여전히 눈을 거대한 자료에 둔 채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강짱돌이는. 너 아니어도. 적이 많다."
"..."
"...지켜보고 싶어서요."
"지켜볼 눈도 많다."
"..."
"상대를 봐 가면서 하라는 거야."
"..."
"그 새*, 우리가 해도 될까말까야."
강주임은 속을 들여다보는 기수석이 무섭다. 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움이 1초 정도 든다. 하지만 강수석의 태연함에 대적할 만한 담담함이 곧 그 뒤를 잇는다.
"이번에는. ...크게 하시는 거잖아요."
"..."
기수석은 설마 이런 식의 답변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흘끗 강주임을 한 번 보고는 거대한 종이를 반으로, 또 반으로 잘게 접어 굳이 서랍의 가장 아랫칸에 고이 안착시킨다.
"딴 놈들 다 죽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죽는 놈이. 강이다."
"..."
금요일의 공인된 막내에게 비로소 독무대를 선사하며 자리를 떠나는 기수석이다. 강주임은 거대한 종이가 에이포처럼 접혀 들어앉은 마지막 서랍장을 응시하며 한참을 서있다가 작은 입을 용케도 오물거리며 혼잣말을 한다.
"내 정년이 더 기니까."
2020년 3월 5일 금요일 맑음
<기획재무부문 송수석> ...
<기획재무부문 이책임> ...
<중부센터 최담당> ...
내가...? 진짜로? 시설? 날... 뭘... 보고?
<중부센터 신위원> 공문이 한 장 비네
어차피 다 바뀔 거 한 번에 내시지 무슨 메일을 이렇게 공들여 쓰셨나. 경력재산정 관련은 연기라... 더 연기는 안 될걸? 오늘 위원장이 한 판 할텐데 것부터 얼른 해주셔야지? 본사에 해당되는 놈 없다고 빠져가지고들. ...아, 강미리. 강미리가... 있었네. ...그리고 최유빈이가 본사행? 뭐, 시설에 가 박혀있기만 해줘도 본전이고. 부서 이동까지 해주면 땡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