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9일
"나 하나 주면 안 돼?"
"네에..., 뭐."
자연스럽게 강탈당하는 국가 제공 마스크를 뒤로하고 오늘도 내돈내산 마스크로 하루를 사는 강주임이다. 09시가 지나자 발령 인사가 줄을 잇는다. 역시나 기재부문의 새 수장이다. 이름도 찬란한 기태림 부문장은 앉을 새도 없이 한 무리의 아저씨들과 툭툭 친근함이 묻어나는 몸의 대화를 나누며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강주임은 이미 ㅇㅇ공사에서 기부문장과 일을 해봤다. 인사는 필요 없다. 강주임에게는 기부문장의 유물인 시설관리부문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새로운 사람들이 둘이나 드는 부문이다. 최담당이, 아니, 최주임이 사무실로 돌아오는 날인 것이다. 동기들이 이제 몇 남지 않았다. 나날이 새로운 경지에 다다르는 이책임과의 기싸움에 지친 강주임은 몇 안 남은 동기 찾기에 열을 올린다. 좋지 않은 눈으로 반대편 끝 시설관리부문을 훑는다. 최주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래층에서 인사라도 다니고 있는 걸까? 멀리서도 그 존재감이 확연한 풍채 좋은 분이 시야에 든다. 그 유명한 쏭과장이시리라. 딱 벌어진 어깨에 175c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신장이다. 액세스 공사에 장군이 있다면 바로 저분이다. 공사 시절부터 유명한 분이셨지만 같이 일해본 적은 없다. 부문장님과도 친분이 두터운 분이니 앞으로 잘 지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아까부터 자꾸 눈앞을 오가는 올블랙 인간 하나가 눈에 거슬리지만 정신을 집중해 쏭과장을 추적한다. 점점 다가오는 올블랙이 시야를 아예 막고 선다.
'아이씨, 뭐야 이거!'
"누나!"
"!"
굽은 어깨에 파묻힌 고개를 미처 다 빼내지 못한 채 고개만 간신히 들어 올린 강주임 앞에는 올블랙의 거대한 최주임이 서있었다.
"어, 어어... 그래, 유빈아. 아, 아니, 최주임님."
"에이, 뭘 또 주임이예요, 어색하게. 이름 불러요 누나."
"으응, 그래, 그러자."
"와아, 인사하느라 한참 걸렸네. 사무실이 넓긴 넓으네요. 저 살 많이 쪘죠?"
"어?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응. 좀... 쪘네."
"현장 가면 다 이래요 누나. 야간 근무가 쥐약이더라고요."
"고생했어."
"누나도요."
"아, 인사드려. 여기 이책임님. 알지?"
최주임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이책임에게로 다가선다.
"어이구, 이게 누구여. 최유빈이."
"대리님, 아니, 책임님 오랜만에 봬요."
"나, 대리 아니고 과장."
"아앗, 죄송합니다."
"아냐아냐, 그게 뭐 최주임 잘못인가. 이 책임제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한순간에 무례하게 만드는 거야."
잠시 애매한 공기가 두 남자를 감싸고돈다. 덩달아 거슬리는 강주임이다.
"아, 부문장님은 수석님들 오셔서 같이 나가셨어. 나중에 다시 인사와. 원래 시설에 있다 오셨거든. 거기 쏭수석님이랑도 공사에서 같이 일하셨었어."
"아, 쏭줌마랑요? 잘됐다."
"쏭줌...."
"아, 수석님이 자기 아줌마라고 쏭줌마라고 부르래요. 크~ 성격 너무 좋으세요."
"그렇구나."
"공사에서 같이 일하셨었죠?"
"아니, 난 기부문장님하고만 일해봤어. 그때 육휴 들어가 계셔서."
"그렇구나, 지금은 쏭수석님네 애들 엄청 잘 뛰어다녀요. 애기 아니고 완전 어린이야 어린이."
"응..., 그래."
강주임은 한껏 들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최주임이 부담스럽다.
'얘 원래 이랬었지...'
유독 눈치 없고 제멋대로였던 동기, 그게 바로 최주임이다. 몇 달 떨어져 있었다고 그의 캐릭터를 망각했던 스스로를 책망하며 시선을 떨군다.
"거, 현장 가더니 나쁜 물이 너무 들었네."
때마침 끼어드는 이책임이다. 강주임도 사무실에서 너무 요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발화는 옳지 못하다.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 제깟게 무어길래 알지도 못하는 현장을 논하며
물이 들었다는 표현으로 사람을 매도하는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리라. 강주임은 이책임이 최근 본인과의 사이가 틀어져 굳이 최주임까지 공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한 마디 던질 기세로 최주임 앞으로 나선다.
"이로운이가 너구나?"
두 주임 나부랭이를 지나쳐 쑥 들어오는 꽃분홍 블라우스에 강건한 풍채다. 저음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타고는 새콤달콤한 향이 퍼진다.
"아, 차장, 아니 수석님!"
천하의 이로운이도 쏭과장의 포스 앞에서는 몸이 움츠러든다. 자기도 모르게 일어서 두 손을 모은 꼴이 두 주임보다도 비참하다.
"태림이형은?"
"예?"
"기형 어딨냐고."
"아, 아아, 방금 전에 저... 강주임 알아?"
"아, 네 부문장님은 1층 카페에 계실 겁니다."
"담배 간 거 아냐?"
"아닐겁니다. 하수석님도 같이 계셨습니다."
"으음, 그럼 커피 갔겠네."
툭툭 다가오는 화사한 빛깔이 강주임을 압박한다.
"반가워요. 나 송아리."
"아, 예, 강미립니다."
갑작스레 건네받은 손을 민망한 손가락으로 잡으려는 순간 강주임의 팔 전체를 억세게 잡아끄는 쏭이다.
"너 나 알지?"
귓가에 속삭이는 무거운 목소리에 겁이 난다. 팔을 움켜잡은 힘이 두렵다.
"네..에?"
"강...주임, 아니고 대리잖아. 너."
강주임은 기부문장이 강대리라고 부르는 통에 한참 전부터 곤란한 와중이다. 본인의 전력을 아는 자가 또 하나 는 것이 반갑지 않다.
"지금은 주임입니다."
"...흐음. 여기 올 때 6급 쓴거야?"
"...네."
"왜? 경력 채용 기다리지?"
쏭은 말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있는 강주임이 귀엽다.
"년차로 치면 한 10년 되지 않니, 너?"
"...아닙니다."
"이 책임님!"
"아, 넵."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던 종잇장 같은 황토색 곱슬머리가 넵하고 단발적으로 입을 뗀다. 강주임은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공기의 눈치를 본다. 이책임도 조마조마하기는 마찬가지다. 쏭은 어울리지 않게 길쭉한 검지를 펴 강주임 앞에서 흔들더니,
"아니, 그렇잖아. 여기가 경력은 더 윈데, 기획은 족보가 꼬여서 어떡해? 어웅, 서로 힘들겠다."
'아...'
강주임은 태초에 선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가뿐히 그것을 넘어버리는 분홍 앞에서 모든 것을 강탈당한 껍데기처럼 초점을 잃고 2m 앞 바닥을 응시한다. 이책임은 그 짧은 몇 초의 시간을 견디며 뭐라 대답해야 할지 수십 번 고민하다 대답을 포기한다.
"와, 누나 10년차에요?"
"유빈이 너 이 새*, 동기면서 암것도 모르는구나?"
"아뇨, 미리 누나 공사에서 일한 건 알았는데 10년차인 줄은 몰랐죠. 아니, 누나 몇 살이야 그럼?"
틀렸다. 틀려버렸다. 한강 둔치에 위태롭게 서있던 강주임을 지나가던 행인 둘이 한순간에 강 속으로 밀어넣어버렸다. 어쩌면 두 사람이 강주임을 밀고 밀어 아주 강을 건너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책임도, 강주임도 새하얀 얼굴로 간신히 호흡만을 유지하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기획인 둘은 정신을 놓고 시설인 둘이 기획에 터를 잡고 넉살 좋은 대화를 이어간다. 떠나간 정신을 붙잡을 기력이 없는 기획인들에게는 그들의 요란한 수다가 물먹은 사운드처럼 들릴 뿐이다.
"아리 왔냐?"
재등장하는 기부문장이다. 이책임은 부문장의 등장에 바로 정신을 잡았지만 강주임은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새 부문장의 귀로를 처진 어깨로 맞이한다.
"강대리 상태 왜 이래?"
얼빠진 강주임을 보고 한 마디하는 부문장이다.
"형도 강대리라고 하는구나. 그치? 쟤 대리 맞지?"
"뭐가, 강대리 왜?"
"아니, 경력 10년이나 달고 여기서 주임하고 있어."
기부문장은 잠시 이책임의 눈치를 살피더니 쏭수석과 강주임을 서너 번 번갈아 본다.
"강대리도 책임이야. 아직 공문이 안 돌아서 그렇지."
"쟤도 대상자구나?"
"있는 경력 산정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 회사에 면허 볼 줄 아는 놈 강대리 하나잖아."
기부문장과 쏭수석의 난데없는 대화에 이책임의 애가 탄다. 노조의 압력으로 현장 직원의 경력 재산정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사에 대상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기획재무부문에 책임이 둘이 된다? 심지어 공사 시절부터 쭉 사업 면허를 봐오던 실무자가 액세스에서 책임을 단다? 이책임은 본인의 입지가 위태롭다는 것을 최초로 인지한다. 과장 달러 왔다가 저 악마 같은 후배에게 잡아먹히게 생겼다.
"저는 이번 재산정 서류 제출하지 않았..."
"내가 했지."
오해를 바로잡으려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강주임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요즘 세상에 누가 누구의 서류를 대신 제출한단 말인가. 그것은 위조이며 기만이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눈동자의 하단부를 치고 든다.
"메일 못 봤구나?"
'아! 지난주 메일!'
지난주 직위해제 공문에 정신이 팔려 메일을 놓치고 있었다. 친히 방문한 정책임이 축하한다며 메일 확인을 당부하지 않았던가. 이 상황이 당혹스럽지는 이책임도 마찬가지다. 공문 직후 당황해 송수석을 따라나서느라 메일 따위 안중에 없었다.
"그거 소속장이 리스팅 하는 거야. 나도 우리 유빈이 뭐라도 있나 한참을 쑤셔봐도 이거 쌩신입이더라고. 불쌍한 새*."
"강대리는 인사에서 첨부한 양식 잘 작성해서 보내고. 거 내일까지다, 잘 챙기는 게 장점인 놈이 왜 이래?"
뭐가 그리 좋은지 헤벌쭉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최주임과 졸지에 승진하게 생긴 강주임의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이 대조적이다.
"와아, 누가 승진해요? 진짜 대리님이시네."
"..."
"현장에도 재산정자 엄청 많대요."
"..."
"준우 선배가 우리 챙겨줄라고..."
"응?"
"아, 그러니까 노조에서 지난번에 승진 못 한 분들 챙겨 주려고..."
"아니, 누구라고?"
"준우 선배...요?"
"신준우?"
"아, 맞다. 두 분 아는 사이세요? 회식 때 누나 말 하던데."
"..."
"아, 아니, 나쁜 말 아니고, 누나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막 그랬어요."
갑자기 등장한 이름에 차가운 사실이 살을 에듯 세 사람의 머릿속을 파고든다. 분위기를 감지한 이책임이 가볍게 핀잔을 준다.
"유빈 주임은 기재부문와서 노조 얘길 하고 그래. 거기 때매 우리가 얼마나 힘든데. 좀 조심하자."
"아, 죄송합니다. 제 사수였어가지고. 죄송해요. 노조랑 기재부문 관계는 생각도 못했네요. 사과드릴게요."
부동자세의 전 공사 멤버 3인 중 가장 먼저 얼음을 깨고 나온 사람은 쏭이었다.
"유빈이 너 이새*, 따라와 .으이구 그냥, 그럼 우리 가요 형~ 얼굴 봤으니 됐네. 강대리도 수고!"
최주임의 귓불을 오지게 잡에 뒤틀어 저 멀리 시설관리부문으로 사라져가는 쏭의 뒷모습이 사무실 중앙을 지날 때쯤 송수석이 느릿느릿 들어와 제 자리로 향한다. 짧고 건조한 마주침에 잠시 그대로 멈춰 선 쏭은 최주임을 자리로 보내고는 이미 한참을 지나간 송수석의 뒤를 밟아 재차 기재무문으로 향한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느릿느릿 기웃기웃 따라붙는 모양새가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던 세 사람의 눈에 정확히 포착된다.
"응? 뭐여? 응? 왜, 다들 이러고 서 있고? 응?"
어린이들을 지나쳐 기부문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가던 송수석은 이윽고 뒤따라온 쏭과 마주친다. 신장차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남은 세 사람을 감싸고돈다. 송수석은 웬 덩치 큰 여자가 길을 막고 서있는 것이 귀찮다는 듯 손으로 휘휘 비키라는 표시를 하고는 의자 등받이를 잡는다.
"아, 얘가 송보강이야?"
'?!'
흠칫 놀란 송수석이 굽은 등에서 목을 쭉 빼 쏭을 올려다본다. 놀람을 그대로 표출하며 쭈뼛쭈뼛 뒤를 돌아 답을 구하듯 부문장을 향해 선다. 되돌아온 쏭을 발견하고는 이미 기립해있는 기부문장이다.
"어, ...어어. 아리는 모르던가?"
"나야 모르지, 후배들 일일이 어떻게 챙겨. 육휴 때 현장에서 올라온 놈 하나 있다고만 들었지."
"보강이도 모르나? 아리."
'..아!'
다시 뒤를 돌아 쏭을 확인하고는 큰 깨달음을 얻은 송수석이다. 그때 그 사람이 이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복직 전의 쏭과 복직 후의 쏭은 다르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를 아는 자라면 누구든 느낄 법한 어마어마한 갭이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다.
"아..., 아아아! 압니다. 알죠. 알다마다요. 아아... 처음 뵙겠습니다. 응? 아니, 저기저... 처음은 아니죠?"
쏭은 당황한 송수석이 귀엽다는 듯 애처롭다는 듯 싱그레 웃는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는 것이 모델같이 삐쭉 솟아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곤 했었던 그때 그 모습이다.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따스한 햇살 같다. 액세스의 엄마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형, 보강이 귀엽네."
"큽."
웃음이 터지는 기부문장과 몸 둘 바를 몰라 배시시 웃으며 몸을 꼬는 송수석이다. 급속히 속이 좋지 않아진 이책임과 감주임은 귀를 열고는 있지만 닫기로 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종류의 가능성이나 능력이 있을 터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이런 역겨운 상황을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에..."
한 발짝 다가가 곧은 허리를 살짝 굽히고는 올려다보는 송수석의 얼굴에 바짝 얼굴을 내리 대는 쏭이다.
"그런데 너 왜 인사 안 하니?"
2020년 3월 9일 월요일 맑음
<기재부문 이책임> 존* 쎄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강짱돌이 날아가고 끈 떨어진 송수석 아래에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말로만 듣던 그 쏭에다 경력 재산정까지 설상가상이구만. 숨어있던 기라인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걸 보니 세상이 변하긴 변했나 본데. 존* 쎈 저 여자는 대체 뭔데 송보강이까지 쩔쩔매는 거지? 말투도 더럽고 이유 없이 날 싫어하는 것 같고?
<기재부문 강주임> 또 어디다 굴려 먹으려고
두 번은 안 당해. 한두 번도 아니고. 책임 달면 또 어디다 막 굴려먹으려고. 가뜩이나 지금 대리 과장 통합제인데 여기서 책임을 달면 대리 돈에 과장 몫을 하게 된다. 그런 일을 또 당하라고? 나는 그저 강짱돌이 어떻게 되는지만 보면 돼. 그놈 말로만 볼 수 있다면 주임이고 신입이고 막내고 아무 상관없어.
<시관부문 최주임> 사무실 공기는 냄새도 다르네
이야~ 내가 또 본사로 돌아왔다 이거지. 그간의 우울함을 잊고 새로 시작하자. 이젠 옆에 술담배쟁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리누나한테 묘한 경쟁의식 느끼지 않아도 되고. 여기가 내 자리! 쏭쥼마랑 같이 진짜 회사생활 시작해 보는 거야. 잘했다 나 자신! 있을 자리로 멋지게 돌아왔다! 이제 다시는 팽 당하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