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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한해달 Aug 23. 2022

기와 쏭과 신, 그리고 최

2020년 3월 12일

 "너무 좋아요, 저. 진짜 너무 좋아."


 오랜만에 해가 뜨고 출근하고 해가 떨어지고 퇴근을 하는 생활로 돌아온 최주임이 1층 카페에서 들뜬 어린이처럼 만족감을 표출한다.


 "그래도 좋은 점도 있지 않았어?"


 현장 경험이 없는 강주임은 미지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가장 최근에 회사의 현장을 경험한 사람이다. 동기이자 동생인 최주임이 아니면 누구에게서 현장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약간의 허풍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


 "음... 좋은 건, 정해진 시간만 일 하는 거? 그건 좋아요. 아, 밥도 먹고 싶은 거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옷값 안 드는 거?"

 "뭐야, 되게 좋네."

 "아니야, 누나. 그것만 좋아요. 겉보기만. 모양새만 좋은 그런 느낌?"

 "연장 근무 없고, 먹고 싶은 거 먹을 수 있으면 직장인한테는 정말 좋은 조건 아닌가?"


 최사원은 동기 누나에게 현장을 알려주고 싶다. 잠깐의 현장 경험이었지만 그 몇 달간 겪은 고통을 어찌하면 가감 없이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고개를 갸우뚱 왼편으로 한 번, 오른편으로 한 번 꺾어 올리더니 이번에는 눈동자를 위로 굴린다. 어떻게 설명해야 상대방에게 와닿을지 고하는 모습이 제법 어른스럽다.


 "이게 그러니까요."

 "응"

 "벌레가 나와요."

 "응?"

 "일하러 내 자리 들어가면 책상에 벌레가 막 기어다녀."

 "아..."

 "내가 바닥 쓸고 닦고 집도 아닌데 회사를 청소하고 살아야 돼."

 "그건... 해야하는 거 아냐? 나도 매일..."

 "아니지, 누난 누가 커피 쏟으면 바닥 뜯어서 카펫 빨고 그래요?"

 "아니..."

 "그런 청소 말하는 거."


 아직 감이 오지 않는 강주임이다.


 "그러니까 말이죠..."


 엣헴 무게를 잡으며 태도를 키우는 최주임이다. 유치원생 조카에게 새 지식을 알려주는 중학생 형처럼 한쪽 다리를 무릎에 걸쳐 올리고는 몸을 앞으로 비틀어 내밀며 적극적으로 말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숙소로 돌아가면 곰팡이가 막 펴있어."

 "응?"

 "비가 오면 여기저기서 비가 새."

 "아."

 "햇빛이 이마를 때리는데 그 자리를 못 벗어나. 막 눈 감고 서있어."

 "풉!"

 "웃기죠? 그게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어, 그래, 미안."

 "밥 시간이 막 어떤 날은 04시, 어떤 날은 21시."

 "..."

 "나도 업무가 있는데 일을 할라치면 국민들께서 그렇게 말을 거시네. 근데 알고 보니 그 국민이 정신병이야."

 "..."


 강주임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의 고충을 들으며 현장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 없구나 생각한다. 강주임은 만년 주임이 좋았다. 갑작스레 달려든 경력재산정이라는 들고양이가 영 못마땅한 것이다. 혹여 급히 승진이라도 하게 되면 현장으로 도망칠 심산에 이것저것 정보를 캐내려 했던 것인데 듣다보니 벌레와 곰팡이의 콜라보는 정말 안 되겠다 싶다.


"한 마디로 구질구질해요."


최주임의 결론은 간결했다.


 "이게, 직장인의 고충이 아니야. 약간... 뭐랄까, 극빈자의 고통? 현장의 고충은 그런 거야, 누나. 자존감이라는 게 사라져요."


 강주임은 후일담을 늘어놓는 최주임에게서 눈을 돌려 카페 테이블을 눈으로 가다듬는다. 손가락을 꼼지락 텀블러를 어루만진다. 현장은 내가 버티기 어려운 곳이 확실하다. 애초에 그럴 것이라 생각은 했었지만 혹시나 했었는데. 이제 됐다. 잠시간의 생생한 증언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우울끼가 기본 탑재된 나다. 그것이 폭발할지도 모르는 곳으로 갈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정말 궁금했던 것은 마저 물어보기로 한다.


 "그..., 사람은?"


 최주임은 주춤하며 모든 표정을 거두더니 의외로 뇌를 거친 후 대답한다.


 "내 사람 하나만 좋았어요."


 최사원의 주춤과 맑은 눈이 영 신경 쓰인다. 괜히 물어봤나 싶어 다른 소재를 찾으려는 찰나,


 "준우... 선배만 좋았어요. 누나도 아는 사람이죠?"

 "...응."


 말없이 홀짝 들이키는 아메리카노의 맛이 고소하다. 최주임은 준우 선배에 대해 알고 싶지만, 더 정확히는 준우 선배와 공사 출신들 간의 관계를 알고 싶지만 지난 몇 달간 누적된 공자 붙은 인간들의 습성이 서서히 옮아오기라도 했는지 전처럼 쉽게 입을 떼기가 어렵다. 마치 강주임이 강부문장이나 송수석과의 대화중 애매한 공백을 만들 듯 그렇게 공백이 등장하고 마는 것이다. 순백의 흐리멍덩한 공기가 폐를 조여오며 둘을 괴롭힌다.


 "엄청 지랄 맞다?"

 "으, 응?"

 "캐비닛 맨 구석에 박힌 거, 제일 아래 꺼 쓰고 막, 공문이나 서류는 막내가 다 인쇄하래. 인쇄 셔틀 들어는 봤나? 회의 자료보다 더 하다니까요. 침대도 나만 2층 올라가래, 졸려 죽겠는데. 침대방 들어가기 짜증 나서 안 잤잖아요, 나."  

 "...그랬구나."

 "종무에 출무에 교대에. 어후, 교대 때는 또 얼마나 지랄하는 줄 알아요? 이건 뭐 군댄가 했어요 내가."

 "응."

 "그리고 산안보 교육요. 그거 꼭 회사 PC로 들으라잖아요. 현장은 내 PC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두대로 돌려 쓰는데 되겠냐고. 막내들은 잠 못 자고 몰래 기어나가서 듣는 거지."

 "아, 그렇겠네."

 "휴가는 또 지들 맘대로지. 내 휴가도 지정해주던데? 이 날 연차 쓰라고. 기가 막혀서."

 

 강주임의 눈치를 살펴 지른 급발진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제법 공백을 메울 줄도 아는 최주임이다. 강주임은 몇 달 간의 현장 경험을 통해 어른이 사는 법을 익힌 최주임이 대견하다. 못난 동생의 성장을 목격한 듯 눈이 시리고 목에 거스름이 생긴다. 천하의 최유빈이도 이렇게 변하는구나 생각하니 내리깐 눈에 슬픈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좋네, 누나."

 "응?"

 "누나랑 커피도 하고, 누나 웃는 것도 보고."

 "그러게. 너도 많이 변했네. 아, 좋은 쪽으로."

 "이제 다 컸지."

 "큽, 뭐래."


 종이 빨대를 손가락으로 휘휘 돌리는 최주임이다. 동기 보는 맛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는 두 사람이다. 포랑포랑 솟아나는 온기 속에서 강주임은 신준우를 떠올린다. 최주임이 신준우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신준우가 나에 대해 어디까지 말했는지 궁금하다. 최주임이 쏭수석과 같이 있는 이상 언젠가는 말해줘야 할 날이 올 텐데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기부문장과 쏭수석과 신준우, 그리고 최유빈.


 정책임의 모습에 자신의 과거를 비춰보곤 했던 그는 이제 최주임의 모습에서 과거의 신준우를 본다. 그 시절의 준우는  남달리 어른스럽고 조용했다. 아저씨들 준우에게 촌티 좀 벗겨내라며 놀려댔었다. 그 단정한 시골 아이를 도시의 공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바로 기라인의 쏭수석이다. 그 쏭이 이젠 최유빈을 선택했다. 유빈이도 변하는 걸까? 변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변하는 걸까? 그 영향이 내게 온다면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청춘드라마들 찍고 자빠졌네."


 최주임의 다이어리가 올라앉은 가방 거치용 작은 의자에 긴 다리를 마름모로 접어 끼어 앉는 쏭수석이다.


 "좋냐?"


 놀람과 반가움이 교차하며 활짝 웃어 보이는 최주임에게 핀잔주듯 말을 걸치는 쏭이다.


 "미리는 동기도 있고 좋겠다 야."

 "아, 네."


 조금 전까지 생각으로 빽빽하던 머릿속이 삽시간에 투명한 젤리가 되었다. 쏭만 등장하면 뇌가 말랑한 젤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태림이형 안 힘들어? 꼬장꼬장하잖아."

 "아, 아뇨."

 "아니긴."


 거인 앞에서 작아진 두 어린이는 거만하지만 싫지 않은 기분 속에서 거인의 취음 행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뜨겁지도 않은지 김이 모락 피어오르는 아메리카노를 세 모금 꿀꺽 삼킨다.


 "야, 유비니 이 새* 이거."

 "왜, 뭐요."

 "아아는 커피가 아니야."

 "...에?"

 "커피는 뜨거운 게 커피지. 안 그래, 미리?"

 "...아, ...아, 아, 예."


 쏭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묘하게 강압적이지만 묘하게 재미있다. 묘하게 권위적이지만 묘하게 친근하다. 공자 붙은 여우 같은 아저씨들 속에서 수십 년을 버틴 곰 같은 인간이다. 그의 내공이 담뿍 담긴 언어와 태도는 언제나 아랫것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

 

 "보강이는 언제 차장 달았어?"


 예기치 못한 질문이 날아든다.


 "아, 몇 달 전입니다."

 "으음, 얼마 안 됐구나?"

 "과장은 언제 달았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 달고 넘어왔다?"

 "..."


 말렸다. 휘말려버렸다.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놓고 원하는 답변을 얻어가는 전형적인 윗사람의 태도다. 친근한 화술에 낚여 본의 아니게 상사의 승진 일시를 밝혀버렸다. 별 건 아니지만 찝찝하다. 평소였으면 재빨리 자리를 피했을 터다. 동기와의 차 한 잔에 긴장을 너무 풀어버렸다. 실책이다.


 "누나, 저 그럼 가볼게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최주임을 향해 까딱까딱 손짓하고 있는 쏭이 눈에 든다. 광택이 감도는 짙은 회색 정장의 소매가 위압적이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던 최주임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잠깐, 혹시 최유빈이 이 자식이?'


 아니다. 이 커피 타임에서 정보를 캐내려 했던 것은 나다. 강주임은 혼란 속에서 쏭에게 매달려 사라지는 동기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아마도 저들은 액세스공사에서 가장 큰 남녀일 것이다. 거대한 둘이 사라지고 초라하게 남은 강주임과 식은 아메리카노 주위로 카페의 웅성거림이 번진다. 이커피타임이 지나 카페가 북적이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도 넘게 남은 커피를 담담히 쓰레기통에 부어 버리고는 텀블러를 한 번 헹구어 들고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강주임 뒤로 작고 굵은 손가락이 콧잔등의 동그란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린다. 까칠한 뒤통수 아래, 겹친 목살 틈으로 타고 내리는 땀이 문을 열고 나가 저만치 멀어지는 배신자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2020년 3월 12일 목요일 맑은 뒤 흐림  


<기획재무부문 송수석> 끈 떨어졌다 이거지?

 아주 그냥 빠꼬미처럼 틀어박혀서 이리저리 정치질이나 해대고, 응? 공사에서 나쁜 것만 배워와서는 말여, 응? 강짱똘이가 그렇게 죽을 놈이 아녀. 아니지, 아니고 말고. 직위해제는 뭐 한 두 번 당하나? 응? 살면서 직위해제 안 당해본 놈 어딨어? 응? 나와보라 그래. 그냥 흔한 직위해제, 응? 해고가 아니고. 결국은 다아~ 돌아오는 거구먼? 두고 보라 그래, 응? 괘씸한 놈.  


<시설관리부문 쏭수석> 탐욕스러운 돼지새*

 빈집 털어 과장 달고 이직해서 차장까지 달았다? 3년 만에? 남의 걸 훔쳤으면 조용히 찌그러져서 살든가. 91일이라고 그렇게 토를 달았다지? 능력도 없이 줄만 서서 사는 인생이 너무 행동이 커. 나대면 나댈수록 돼지 냄새가 너무 나잖아. 아, 이 집 족발 정말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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