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지만 우리는 서로 잘 모른다
우리 집은 길에서 짧게 들어오는 골목의 첫 번째 집이었고 양옥집이었다.
대문에서 들어오는 안채를 우리가 사용하고 사글셋방이 뒤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에 매주 수요일마다 부모님은 우리를 두고 두 분이서 수요예배를 가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씻고 내의를 입은 채로 보고 싶은 TV프로를 보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날이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TV를 보고 있는데,
안방의 큰 창문 밖으로 커다란 사람 그림자가 한참 서 있었다.
우리 셋은 동시에 그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무서워 TV소리를 크게 켜두고 방구석에 모여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그림자를 관찰했다.
한참을 서 있던 그 사람 그림자는 점점 오른쪽 부엌과 통하는 문쪽으로 움직였다.
오른쪽에도 작은 창이 있었는데, 분명 그 사람은 부엌문을 통해 침입을 시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엌 쪽으로 왔다가 다시 큰 방문 쪽으로 왔다가 그렇게 한참을 살피다가 사라졌고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빈틈이 없이 막아 둔 채로 엎드려,
땀이 비 오듯 해도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한 우리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부모님을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 부모님이 돌아오시자, 달려 나가 앞다투어 이 일을 이야기했고,
태연하게 반응하면서도 엄마, 아빠는 집안 곳곳 자물쇠를 확인하셨다.
다섯 식구 온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안심되고 기쁘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 시절 좀도둑은 너무 흔했고 그때 우리 삼 남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 옛날 대문 손잡이가 왜 무시무시한 표정의 사자인지 이제 좀 이해된다.
사자야, 잘 지켜라 우리 가족.
가족이지만 우리는 서로 잘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삼 남매는 모두 17세에 독립을 한 셈이다.
2년 터울인 우리, 고등학교부터는 언니도 도시로 유학을 갔고, 남동생도 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나만 집에서 50분 거리 M시로 통학을 했다.
우리가 함께한 세월은 17년 정도이다.
같이 먹고 자고 뛰놀며 함께 웃고 싸우기도 하며 많은 것을 공유한 어린 시절의 나날들 말이다.
씩씩해 보여도 겁이 많은 나는 밤에 화장실을 갈 적엔 늘 양초를 들고 동생과 함께 화장실을 다녔다.
내가 큰 일을 보든 작은 일을 보든 냄새나는 화장실을 따라 들어와 불빛을 훤히 비춰주던 동생은 자주 앞머리가 촛불에 그슬리곤 했다.
여름엔 커다란 고무대야에 하나씩 물을 받아 홀딱 벗고 들어가 누워 같이 목욕을 했으며,
소독차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면 뛰쳐나가 뿌연 소독가스 가득한 도로 위를 소리치며 달려 다녔다.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뛰쳐나와 만나는 그 재미가 그렇게 신났었다.
하염없이 따라가다 다른 동네서 길을 잃어버린 애들도 있었으니,
소독차는 피리 부는 사나이 같았달까?
먹을 것이 없던 그 시절엔 전투가 따로 없었다. 삼 남매의 생존경쟁은 집에서 이미 시작된 것.
엄마가 씻어주신 포도 한 송이는 순식간에 가지만 남고 알맹이는 우리들 양쪽볼에 가득 담아 다람쥐처럼 저장한 포도알갱이를 천천히 두고두고 씹어 먹었다. 하나라도 더 따먹으려 머리싸움을 했던 기억이 난다.
겨울에는 귤 한 박스를 며칠 만에 손발이 노래지도록 부지런히 갖다 먹었으며, 누구라도 똑같이 나눈 것에서 더 먹으면 눈을 흘기고 머리를 떄려가며 공정과 공평을 습득하였다.
빈 유리병을 모아 고물상에 갖다주고 받은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쌀포대를 들고 동네 언덕배기에서 미끄럼을 타러 다니기도 했다.
언니와 동생은 참 순둥이들이었는데, 언니 친구들이 언니를 괴롭히는 것 같아 그 언니들을 쫓아다니며 관찰하고 언니가 안전한지 살폈고, 집에서는 우리한테 무서운 언니가 왜 저렇게 말없이 당하는지 눈물이 날 정도로 답답했었다. 남자아인데로 공격성이 제로인 동생은 더 어린놈들한테 당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 놈들은 쫓아가 때려주었다. 그래서 엄마가 골치 아픈 날들도 있었다.
동생이 태권도를 시작하고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듬직하게 달라지는 게 내가 괜히 뿌듯했다.
괴롭힘 당하는 친구들을 구해낼지언정 당해본 적이 없는 씩씩한 나였지만,
집에서는 남모를 소외감과 외로움이 늘 있었다.
언니는 첫째라서 새것을 사주고
동생은 아들이라서 새것을 사주셨다.
나는 언니의 것을 물려 쓰는 것이 무언의 약속이었기에
때로는 서럽고 때로는 화가 나 심통을 부리곤 했다.
부모님께는 " 나 주어 온 딸이냐?"라고 자주 묻기도 했다.
그런 내 마음은 몰라주고 내가 꼬장을 부릴 때면 고집쟁이라 했고, 욕심쟁이라 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도
표현이 서툴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리는 것이 미숙한 것이 흠이었는데,
좀 더 따뜻하게 있는 그대로 사랑을 표현하며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모님은 "우리 딸들은 다 아들 같아서 애교가 없어요. "라고 말하시곤 했다.
유머와 재미는 마음껏 발산하면서도 중요한 사랑의 감정은 표현하지 않는 것이 우리 가족의 특질이 되어 모두 익숙해져 갔다.
엄마에겐 하나뿐인 아들, 내 동생.
그 녀석이 옥상에서 떨어진 그날이 또렷이 기억난다.
80년대 흔하디 흔한 양옥집의 바깥 화장실, 그 위는 옥상이었는데
옥상 바로 아래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는 동안 나는 계속 동생을 불렀다.
한낮에도 화장실이 어두컴컴 무서우니 동생 목소리라도 들리면 낫겠다 싶어서
"ㅇㅇ 야~" 하면
" 으응~" 하고 동생이 대답해 주었다.
옥상에서 아래 화장실 쪽을 고개 숙여 내려다보며 몇 번 답을 하던 동생이
쿵~하고 떨어졌다.
내 나이 6살쯤이었으니, 동생이 4살이었다.
부엌에서 소리를 듣고 고무장갑을 낀 채로 뛰어나온 엄마,
순식간에 축 늘어져 엄마 품에 안긴 동생.
화장실에서 급하게 뒤처리를 하던 내가 했던 생각까지 기억난다.
'엄마한테 혼나겠다. 이번엔 정말 크게 혼나겠다...'
동생을 안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병원으로 달리던 엄마의 뒷모습.
언니는 나를 흘겨보았고, 꿀밤을 주었으며
나와 집에 남아 울며 같이 기도했다.
동생을 살려주시라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걱정을 하며 마음 졸이던 몇 시간이 지나 엄마와 동생이 돌아왔다.
"하나님이 받아주셨다. 하나님이 받아주셨어."
안도하며 큰 한숨을 쉬시는 엄마는 동생이 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왜 내 동생을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을까?
정말 미안하다고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라고 말해주지 못했을까?
어색하고 멋쩍어 모르는 척 방에 들어와 버렸다.
슬쩍 따뜻한 아랫목을 양보하고 우리 셋은 엎드려 여느 때처럼 TV만화를 보았다.
하나뿐인 내 동생.
동생은 참 착하고 성실한 놈이었다.
세뱃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통장에 돈이 수북한 놈.
늘 빌려 쓰고 내년 설에 갚겠다는 말을 했지만, 잘 갚지 않는 불량한 누나인데 계속 빌려주던 놈.
하얀 피부에 쌍꺼풀, 깊이 파인 보조개
우리 삼 남매 중에 가장 이쁜 놈이었다.
쌍꺼풀도 , 보조개도 없는 나는 늘 이 이쁜 녀석이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같아
얄미웠다. 그런 질투와 심술이 올라올 때면 괜히 뒤통수를 때려 울리고 엄마 몰래 거친 욕과 함께 발로 차기도 하는 못된 누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 아빠가 나도 꽤 귀엽다고 사랑스럽다고 해줬으면 심술이 덜하지 않았을까?
나는 늘 고약한 녀석이라 불렸으니...
그래도 밖에 나가 동생을 건드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으리으리한 의리파 누나.
가족이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서로 잘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마음속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가 서툴다.
지금 동생이 아프다.
그 착하고 순한 놈이 눈만 껌뻑이며 눈물 훔치던 놈이 마흔 줄에 마음이 병들어있다.
근데 괜찮다 한다.
여전히 다 표현하지 않는 게 익숙한가 보다.
나도 동생을 다 모른다.
하지만, 그 착한 놈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솔직한 마음을 제 때에 말해주어 그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내면 좋겠다.
사랑한다 내 동생.
힘내라 동생 마음아.
널 괴롭히는 놈들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할매가 돼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