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받은 마음의 모양과 정신을 해석하는 일.
가족은 사회단위의 가장 작은 모습이라 했다.
이 가장 작은 관계가 제일 어렵다.
배려의 기준도, 사생활 경계도, 소유의 기준도 모든 것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습관으로 굳어진 역할. 가족 분위기 속에 고착된 자기자신에 대한 관념.
그 틀 안에서 나는 자주 '나 자신'을 완전히 잃는다.
아이야,
“나 혼자였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너의 풀죽은 목소리를 들었단다.
그늘져버린 너의 입꼬리와
눈치를 살피며 움직이는 너의 눈매가
가슴을 뻐근하게 한다.
그건 어린시절의 엄마의 모습이니까.
아이야 너무 미안하다.
동생을 챙기느라 네가 먼저 울지 못하는 순간마다,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며 스스로를 눌러두는 표정마다,
너의 조심스러운 침묵에서 그때의 '나의 숨결'이 다시 들린다.
엄마 어릴적에,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고 정말 가난했지.
그 시절, 엄마의 어깨엔 ‘장녀’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어.
그건 엄마 자신을 잃게 만든 이름이기도 했지.
그 시절, 시대의 공기와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부터
쭉 엄마는 가족을 위해 나 자신을 지웠고,
부모의 눈치를 읽는 것이 어른스러움이라 믿었다.
엄마는 그때, 엄마의 엄마, 너희 할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했단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였어.
그저 할머니의 주눅 든 모습과 묵묵히 뒷모습으로만 말하던 삶의 무게를 보고 있었지.
그 모습을 보는 동안,
엄마는 말없이 자신을 조심스레 눌렀단다.
도와드리고 싶었고,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때는 몰랐지.
사실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도덕’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건 ‘어린 나의 잘못’이 아니라,
세대가 물려준 인식의 구조였음을 이제야 안다.
그러나 몸에 베어버린 내습은 사라지지 않았단다.
가족의 평화를 위한다는 엄마의 두려움을 감추는 삶의 방식은
결국 같은 공기를 물려주었지.
주변 가족의 눈치보는 모든 행동과 말없이 자신을 죽이는 태도로
너에게 흘러갔던거야.
아이야,
엄마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엄마 자신을 지우는 일은
결국 사랑의 모양마저 왜곡시키는 일이었단다.
그때는 몰랐지.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이 어쩌면 가장 조용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가족이란 공동체는 참으로 특이해.
그 안에서는 언제나 힘의 균형이 뒤집히거든.
겉으로는 강자가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약자가 중심이 되지.
아픈 사람, 힘든 사람, 약한 사람, 어린 사람....
가족은 늘 그 한 사람의 필요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그 주위를 맴돌며 무너진 균형을 애써 붙들려 하지.
엄마와 이모, 삼촌도 그랬단다.
돌봄이 필요한 여섯 살, 아홉 살, 열두 살의 아이들이었지만,
돌보는 자의 자리로 밀려났지.
어른들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며, 스스로를 어른의 위치에 세워야 했단다.
그건 생존이었고, 동시에 체념이었어.
기댈 곳을 잃은 채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야 했지.
아이야.
엄마는 여전히 그런 삶의 방식으로 엄마의 정신을 길들이고 있었구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은 점점 ‘해야 하는 일’이 되어,
두려움으로 바뀌어 있었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을 잃을까 봐.’
‘누군가의 짐이 될까 봐.’
그런 마음이 엄마를 여전히 묶어두었어.
사랑을 지키려던 마음이 두려움을 만들어낸 도덕이 되어
세대의 내습으로 엄마 안에 자리 잡았구나.
그러나 이제,
엄마는 근경(주1)의 끝자락에 서 있단걸 안단다.
세대를 통해 이어진 감정의 구조를 해석할 자리,
줄기의 굵기를 키우듯,
삶의 결을 스스로 자각으로 살찌워야 할 시점이다.
그건 과거를 끊어내는 일이 아니라,
근원을 간직한채, 도달한 흙마다 새로운 방향을 세우는 일이란다.
고사리가 깊은 땅속을 더듬으며
스스로 숨쉴수 있는 흙을 찾아 뻗어나가듯,
엄마도 감각을 해석할 정신을 찾아 배움을 멈추지 않으려해.
가족의 중심을 약자에 두되,
그 약함이 서로를 묶는 굴레가 아니라
짐으로 져야 하는 무게가 아닌
함께 살아나게 하는 방향이 되게 말이야.
그 방향이 근원을 지키며 스스로 솟아오르는 힘이 되기를.
엄마는
누군가의 보호자나 희생자가 아닌,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아내는 존재로 서고 싶다.
이 정신이야말로,
근경의 새로운 근원으로 새겨져
다음 생으로 이어질 삶의 유산임을 안단다.
아이야,
세상이 새겨준 얼굴로 살지말고, 자신의 얼굴을 세상에 새기자.
엄마가 미안하고 많이 사랑한단다.
(주1) 근경(根莖)은 뿌리처럼 보이지만, 땅속 깊숙히 뻗어나가는 지하 줄기이다. 고사리는 근경을 가진 식물로 줄기 끝마다 생장점이 분열하면서 옆으로 굵게 자라나간다.
생장과정에서 위로는 새순을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며 군락을 이룬다. 근경은 생의 에너지 원천이자 하나의 줄기에서 동일한 개체를 피워낸다. 한번의 생장이 끝나도, 근경은 죽지 않고 새롭게 생장한 이어진 새줄기에서 또 다른 생이 피어나는 구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