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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기 위해 동료를 구하는가

동료와 함께 더 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버는가

by 지선


아이야.

태도는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단순히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로 판단되지 않는다.


엄마가 지금 공부하며, 삶을 정돈하고, 정신의 질서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세운


태도란

내면의 결(신념·가치의 우선순위·책임감)을

행동의 결(언어·표정·행동)과 일치시키는 실천이다.


내면과 행동의 일치는 대게 조용하고 단단하게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나.


격식과 예의는 태도의 옷일 뿐,

옷차림을 잘 차려입었다고 태도의 깊이가 증명되지는 않더라.

반대로 말투가 부드럽지 않더라도,

시간이 증명하는 책임감과 정직이 태도를 말해 준다.


조직의 공동작업에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는 많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늘 자리를 지키고,

갈라진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며 합의를 만든다.

거짓을 눈감지 않고

기준이 흔들리지 않고

약속을 지켜내는

이런 무영광의 지속성이 내면과 행동이 일치하는 태도의 본모습이다.


매일의 반복된 그리고 섬세한 선택이 쌓여 태도가 만들어 진다.

말 한 번의 온도보다, 이것이 더 깊은 증명이란 걸 우리는 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게 있다.

내면과 행동이 일치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니거든.

왜곡된 신념도 일치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태도의 기준은 단순히 “내 안에서만 일관된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일관성이 진정한 태도라 불리려면

관계안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야 하고,

착한 덕목으로 얇게 발라낸 친철이 아닌

나를 지키면서도 고집으로 흐르지 않게하는 실질적인 타자를 향한 배려,

더 큰 삶의 조화와 질서 속에 놓여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아이야

엄마는 지금 태도를 훈련하는 중이란다.
내 안의 결을 단단히 세우려 애쓰지만,
그 결이 언제나 곧고 흔들림 없는 건 아니야.
그래서 더 자주, 관계 속에서 부딪히며 배우고 있지.

그럴 때마다 깨닫는 건,
태도는 내 안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소통의 문제가 따라오지.


사람들은 종종 엄마의 말투를 차갑다고 해.

아마도 일을 할때 효율적 표현을 우선시에 두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을 하기 때문일거야.

게다가 엄마는 그다지 귀엽지도 않고, 목소리도 낮은음색에 속하잖아.

상대방에게 엄마가 보내는 사회적 신호가 딱딱하고 차갑게 전해질수도 있지.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예의와 존중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의 해결 방식을 밀어붙이는 순간에는 그것이 모난 행동으로 비칠 때가 있다.

이 불일치의 지점에서, 엄마 역시 불편함과 화를 느끼고 마음이 크게 동요하곤 해.


돌이켜보면, 엄마의 격한 반응은 눈앞의 사건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쌓여온 작은 불만과 피로가, 그날의 작은 불씨에 붙어 감정으로 폭발한 것이더라.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아무리 사리분별된 말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따뜻함이 없어 날이 서 보였을 테지.

그 객관적인 말이 엄마에겐 정직이었지만, 상대에겐 차가운 칼처럼 다가왔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이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어긋남의 문제였던 거야. 그 불일치 속에서 결국 서로 마음이 다쳤다.


그러니 엄마는 늘 물어야 해.

그때의 불편과 화난 감정은 단순한 자존심의 발작이었는지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려는 결단이었는지

아니면 지적을 견디지 못한 미숙한 방어였는지를.


그렇게 성찰하며 조금씩 태도를 훈련해 나가고 싶다.


그래서 엄마는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먼저 엄마의 말이 어떤 결을 품어 전해졌는가를 돌아보게 되었어.

애덤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하나 알게 된 기준은

태도는 나의 내면에만 머무는 성질이 아니야.

누군가에게 닿는 과정 속에서,

그 결이 어떻게 읽히고, 어떤 울림을 남기는가로 검증되는 거란다.


소로우는

어떤 사람은 굳게 잠긴 금궤와 같다.

동감이라는 열쇠없이 그 금궤를 열려 했다가는 우리의 마음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고 했어.


태도는 내면과 행동의 결을 맞추는 실천이지만,

태도가 상대에게 살아서 전달되려면,

반드시 동감이라는 열쇠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소로우를 통해 배우게 되었단다.


동감없는 정직은 상대에게 비판으로 들릴 수 있고

동감없는 책임은 상대에게 강요로 다가올 수 있으며

동감없는 신념은 상대에게 독선으로 비칠 수 있다.


동감은 정직의 방향을 결정한다.

정직은 그 자체론 선도 악도 아니다.

때로는 무너진 질서 가운데 기준을 세우기 위해,
혼탁을 가르며 나아가는 칼날처럼 드러나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불의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기도 하지.


그러나 정직이 언제 칼날이 되고 언제 방패가 되는지는
그것이 담아내는 동감의 결에 달려 있다.

공감이 스민 정직은 갈라진 틈을 잇는 다리가 되고,

서로가 함께 설 수 있는 자리를 열어준다.


엄마가 지금 느끼는 동감은, 연민이나 감정적 동요가 아니야.

그것은 상대의 결이 내 안에서 울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때,

비로소 내 속도와 그의 속도가 맞닿아 보이지 않는 선율을 만든다.

그 선율이 바로 공명이라고 이야기 할수 있어.


그러니 아이야

태도는 나의 결이지만,

공감은 그 결을 상대와 이어주는 힘이다.

태도와 공감이 함께할 때

말은 무기가 아니라 다리가 되고

대화는 상처가 아니라 공명의 장이 된다.


이렇게 태도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 협력의 영역을 형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능력보다 먼저 봐야 할 결이다.

그러나 결의 일치를 지나치게 좇다 보면,

협력은 협소해지고 공동체는 닫힌 울타리가 되기 쉽다.


삶을 더 깊이 살아내려는 사람은

결이 다른 협력에 쉽게 몸을 내맡기지 않는다.

억지로 묶인 협력은 나를 소모시키고, 내 깊이를 얕게 만들어버린다.

아무에게나 마음을 열면 내 깊이를 허무하게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내 깊이를 함께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데 기준이 있다.

나와 같을 필요는 없지만,

나의 태도와 가치를 짓밟지 않는 사람.


내가 더 깊이 살아내야 한다는 태도는,

결국 내가 어떤 협력을 선택할 것인가 기준을 세우는 힘으로 이어진단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선택과 분별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누구와도 맞추어야 한다고 배워왔지만,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내 깊이는 소모되고, 내 결은 깎여 나가 버린다.


그러니 아이야,
네 깊이를 존중해 줄 동료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네 삶을 얕게 만들지 않고,
네 내면을 하나의 존엄으로 인정해 주는 동료를.

엄마도 아직 잘 모르지만,
이 찾음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때로는 고독을 견뎌야 하고,
때로는 수많은 만남 속에서 스스로를 시험해야 해.


그러나 이 과정 자체가 나의 깊이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깊이를 존중할 동료를 찾는 일은,
곧 내가 내 자신의 깊이를 존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내가 먼저 그런 동료가 된다면, 그 만남은 결국 나를 향해 다가오게 된다고 한다.


아이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찾아라.
찾는다는 것은 곧 고르는 것이고,
고른다는 것은 이미 네 삶의 태도를 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택한 협력 속에서만
네 깊이는 더 깊어지고, 네 존재는 더욱 또렷해진다.


오늘날 1인 시대에는 혼자서도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자본주의는 관계를 거래로 환원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어떤 거래를 관계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그래서 동료를 찾는다는 건 돈의 계산을 넘어서,
함께 뿌리를 얽어 더 큰 숲을 이루려는 선택이다.
그것은 곧 함께 살아내는 힘을 더 크게 세우는 일이다.


“돈을 버는 일”을 위해 만나는 동료인지,
“돈을 넘어, 내 깊이를 존중할 동료”인지는

너의 태도가 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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